[책&생각] 신춘문예 등단작은 첫 책에서 뺐습니다
내년 등단 25년·첫 작품집 20년
2000년 등단 후 청탁 없어 회의
쓰다 보니 닿은 새 세계 ‘아오이가든’
격리사회 공포·혐오 ‘낯선 미학’으로
등단한 해에 회사에 입사했다. 학습지를 만드는 외국계 회사였는데, 아침이면 전 직원이 둥글게 모여 조회를 했다. 주 5일제가 시행되기 전임에도 이미 토요 휴무제를 하고 있었다. 아침 9시15분 출근, 오후 5시45분 퇴근인 점도 유머러스해서 좋았다. 물론 회사 생활이므로 유머가 아닌 일이 자주 생겼다. 출근 전에 외국어도 배워야 했고 워크숍이나 출장도 빈번히 갔다. 기획서와 보고서를 작성할 일도 늘고 팀원들 간에 인사 평가서도 썼다. 마음을 다치고 마르게 하는 일들이었다. 그래도 책을 읽는 것이 업무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일을 좋아했다.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걸 선호하는 성격도 사무원 생활과 그럭저럭 어울렸다.
등단은 했지만 청탁이 오지 않던 때였다.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없다면, 누구도 소설을 원하지 않는다면 더는 작가가 아닌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청탁과 관계없이 계속 소설을 썼다면 그런 생각을 안 했을 텐데, 아무래도 쓰지 않게 되었다. 독자를 기약할 수 없는 소설을 홀로 써나갈 만큼 사무원은 호락호락 시간을 내주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한 잡지에서 청탁이 왔다. 그 당시 아직 국내에서는 개념이 생소한 프로파일러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에 영감을 받아 트라우마와 우발적 살인에 관한 소설을 썼다. 습작하던 때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이야기였고 뜻밖에도 흥미로웠다.
이후에도 사무원 생활은 계속되고 청탁은 여전히 없었다. 다시 일 년쯤 지나 역시 소설을 못 쓰려나 보다 생각할 즈음 청탁이 왔다. 그 무렵 구독하던 과학 잡지에서 본 기사를 토대로 맨홀에 사는 아이들 이야기를 썼다. 누군가 읽어주리라는 확신이 없어서인지 오히려 쓰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써나갔다.
여전한 사무원 생활 가운데에서도 소설을 쓰는 시간이 조금씩 두터워졌고, 2003년에는 첫 책의 표제작인 ‘아오이가든’을 발표했다. ‘사스(급성호흡기증후군)’라는 전염병이 홍콩을 휩쓸었을 당시 집단 감염자가 발생해 최초로 코호트 격리된 ‘아모이 가든’이라는 아파트를 모티프로 삼았다. 지금에 와서는 코호트 격리라거나 감염에의 공포 같은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도래할 리 없는 암울한 미래를 목격한 기분이었다.
2005년에는 그간 발표한 작품을 묶어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등단의 기회를 준 신춘문예 당선작은 수록하지 않았다. 시차를 두고 띄엄띄엄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을 위해 습작하던 시기와는 전혀 다른 경향의 작품을 쓰게 된 것이다. 신춘문예 당선은 내게 작가의 문을 내주었다. 하지만 그 문을 열고 나아가 비로소 작가라고 여기게 된 것은 첫 책인 ‘아오이가든’을 통해서였다. 대다수의 작가는 쓰고자 하는 세계와 함께 ‘탄생’하지만, 어떤 작가는 작품을 써나가면서 세계를 ‘발견’해 나가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로 말하자면 당연히 후자였다.
첫 책은 붉은 피를 뚝뚝 흘리는 듯한 개구리 그림이 그려진 강렬한 표지를 달고 등장했다. 가족들은 고생했다고 말해주었지만 책을 읽지는 않았다. 아마도 읽어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직장 동료 중에는 내게 ‘이런’ 소설을 쓰는구나, 하고 말해주는 사람이 많았다. 보통과 다른 소설, 익숙한 소설은 아니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내가 쓰는 게 ‘이런’ 소설이어서 좋았다.
지난해에는 출간된 지 20년 다 되어 ‘아오이가든’의 개정판을 펴냈다. 이야기나 문장을 다듬으면서 소설을 쓰던 당시의 에너지와 미숙함을 가급적 훼손하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개정판 작가의 말에 적은 것처럼 지금 ‘아오이가든’은 ‘내게 가장 가까운 이름이자 가장 먼 이름이 된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담긴 날것의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 작가로서 근사한 세계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가열찬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어떤 시작은 마지막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나의 첫 책인 것은 작가로서 여전히 행운이다.
편혜영 소설가
그리고 다음 책들
서쪽 숲에 갔다
첫 번째 장편소설은 비밀을 담은 은밀한 숲을 배경으로 삼고 싶었다. 속도와 방향을 헤아릴 수 없는 곳, 삶에 익숙한 누구라도 길을 잃는 곳,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른 면모를 만나게 되는 숲에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찬찬히 제 삶을 되짚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했다. 여러 이유로 이 소설은 두 번째 장편소설이 되었다. 서사적으로 몹시 서툴렀지만 이 작품을 통해 내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싶은 이야기가 몰락하는 인간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문학과지성사(2012)
사육장 쪽으로
첫 책으로 ‘아오이가든’을 출간한 후 그 세계의 강렬함을 심화시키거나 유지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이 책에 담긴 소설들에는 깊이와 넓이를 두고 고민한 자리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그 과정에서 방향과 보폭을 일일이 정해두고 소설을 쓸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가고자 하는 세계가 명확하지 않을 때는 헤매더라도 우선은 무엇이든지 써봐야 한다는 것을, 그러다 보면 흐릿한 세계의 윤곽이 잡히기도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문학동네(2007)
홀
첫 책 출간 이후 쉬지 않고 소설을 써왔는데, 다시는 소설을 쓰지 못할 듯 낙담하는 상태에 도달했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고 쓸수록 나아진다는 확신을 잃었으며 쓰려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날마다 정기적인 시간에 소설을 쓰러 갔다. 새로운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서 이미 가지고 있는 단편의 이야기 틈을 촘촘히 메워가는 식으로 조금씩 써나갔다. 어떻게든 계속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다음 이야기가 찾아왔다.
문학과지성사(2016)
어쩌면 스무 번
이야기를 구상할 때 정해둔 원칙은 한 가지이다. 등장인물들에게 독자들이 모르는 비밀을 하나씩 가지게 할 것. 그것은 현실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어쨌거나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며 사는 사람은 없다. 사소하다 여긴 비밀이 서로를 의심하게 하고 긴장을 강화하며 미스터리를 유발하는 서사를 좋아하는데,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쓰면서 일상적 차원에서의 미스터리를 구현해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문학동네(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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