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아키히토 일왕은 왜 ‘상징’이길 거부했나

한겨레 2024. 10. 1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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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오사무 명예교수
‘상징’적 존재여야 할 일왕
일본국헌법 정면 위배 비판
‘국민’과 ‘정치’ 배제 우려
지난 2018년 12월23일 아키히토 일왕이 일본 도쿄 황궁에서 미치코 황후(오른쪽) 옆에서 마지막 생일 연설을 하고 있다. 아키히토는 2019년 4월30일에 퇴위했다. EPA 연합뉴스

천황 아키히토와 헤이세이 일본사
냉전 후 30년, ‘상징’천황이란 무엇이었나
와타나베 오사무 지음, 박삼헌 옮김 l 뿌리와이파리 l 2만2000원

와타나베 오사무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의 ‘천황 아키히토와 헤이세이 일본사’는 직전 일왕(천황)인 아키히토(明仁) 재위 시기 활동상과 퇴위 이후 평가 등을 통해 일본 천황과 천황제의 함의를 묻고 답하는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은이는 아키히토의 재위 기간 공무(公務)가 일왕의 존재 의미를 ‘상징’으로 규정한 일본국헌법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아키히토는 재위 기간 내내 재해피해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만나 위로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격전지였던 사이판, 팔라우 등을 방문해 전몰자 위령에 앞장섰다. “틈만 나면 ‘평화’를 입에 달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파격 행보를 보여준 ‘헤이세이(平成)의 일왕’, 즉 아키히토는 ‘헤이세이류(平成流)’라는 예찬을 받기에 이르렀다.

일본국헌법 제1조에 따르면 일본 일왕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다. 하지만 아키히토 재위 30년의 동향은 “헌법이 지향하는 천황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은이는 한발 더 나아가 “쇼와 천황과 아키히토 천황의 시대를 비교해 보면, 아키히토 천황의 시대가 헌법이 지향하는 천황상에서 훨씬 더 일탈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상징에 머물러야 함에도 “국민의 민주적 선출에 의하지 않은 천황의 정치적 언행이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아키히토는 2019년 4월30일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스스로 퇴위했는데, 천황의 퇴위는 “국민과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가 결정할 사안”임에도 천황이 주도한 점도 일탈 중 하나라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1992년 10월, 아키히토의 중국 방문은 헤이세이류를 강화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중국은 1989년 즉위한 새 천황을 불러 ‘사죄’하게 함으로써 “중국과의 오랜 역사 문제에 결착(決着·완전하게 결론 지음)을 보려” 했다. 또한 “헌법상 원수도 아닌 천황을 ‘원수’처럼 다뤄온 일본 정부의 운용을 고의로 악용하여 수상이 아니라 ‘원수’ 천황의 방중을 요구”하는 노림수도 있었다. 일본도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다. 일본은 “시장경제라는 배에 올라탄 중국의 거대한 시장”을 선점하고자 했다. 미·일 동맹이 다소 흔들리는 와중에,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선출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은 중국이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기대도 적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아키히토의 방중은 양국의 역사 문제를 마무리하지 못했고, 일왕의 위헌 행동이 늘어나는 계기만 만들어졌다. 그때까지 자신의 ‘권위’가 적은 것을 고민하던 아키히토에게 ‘자신’(自信)을 심어주었고, 이후 ‘헤이세이’ 시대에 일왕의 위헌적 행동이 비대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아키히토는 자신의 노선을 형성함에 있어 “두 개의 선례”에 주목했다. 하나는 “유럽 왕실, 특히 영국의 왕실과 입헌군주의 행동양식”이었다. 아키히토는 “영국의 군주를 자기 천황 노선의 모델”로 인식했던 것이다. 한편 그는 “일본 천황제의 전통” 그 자체를 또 하나의 모델로 삼았다. 즉 “기도하는 천황, 국민과 일정한 선을 긋는 천황”이 아니라 일본국헌법 제1조가 규정하는 ‘상징’ 그 자체가 스스로의 행동을 허락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노선을 정한 아키히토는 “정력적인 지방 행행(行幸), 행계(行啓), 재해피해자 방문, 장애인과 약자에 대한 배려,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 등을 이어갔다. 이제 아키히토의 모든 활동상은 헌법이 명시하지 않았지만 ‘공적 행위’로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2012년 12월 자민당이 대승을 거두면서 다시 아베 정권이 탄생했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 “전후의 보수정권과 천황의 관계에서 일찍이 없었던 사태”가 발생했다. 전후 처음으로 보수정권과 일왕 사이의 강한 긴장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보통 일본의 우파 혹은 전통파는 일왕과 천황제를 옹호했다. 하지만 아키히토의 활동상을 중심으로 헤이세이류가 힘을 받으면서, 오히려 보수파가 “강하게 천황 비판”에 나선 것이다. 반대로 일왕과 천황제를 심하게 경계했던 리버럴파와 온건 보수파가 “천황과 천황제 옹호의 논리”를 내세우는 묘한 “뒤틀림”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군사대국 정책과 “황통 존손·황위 안정에 대해 냉담한 태도”로 일관한 아베 정권에 대한 아키히토의 불신은, 결과적으로 ‘아키히토파’라고 할 만한 하나의 그룹이 형성되면서 아베 정권을 정치적으로 압도하는 상황을 낳기도 했다.

지은이에 따르면, 헤이세이류의 유산은 분명하다. 일왕이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목적으로 하는” 공공연한 발언을 통해, 상징으로 규정한 일본국헌법의 일왕의 역할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상징’의 의미 자체를 바꿔 현 일왕 나루히토(德仁)의 역할마저 규정하게 되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코로나19 당시, 과거 아키히토가 그랬던 것처럼, 나루히토가 “천황 메시지를 발표해야만 한다는 등의 연설이 버젓이 등장한 것”은 그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상징이라는 권위에 대한 의존, 권위에 의한 ‘대행’ 의식” 역시 확대되었다. 일왕은 전쟁 책임이나 오키나와 문제, 원자력발전 등의 문제를 “해결할 자격도 능력도 없을뿐더러 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음에도, 계속 발언함으로써 모든 행위의 주체여야 하는 ‘국민’과 ‘정치’를 배제하는 효과를 낳았다.

지은이는 “쇼와 천황 시절에는 정치에 이용되고, 헤이세이 시대에는 아키히토의 의사에 의해 비대해진” 일왕 제도를 “헌법의 자유와 평등, 국민주권의 원칙에 따라 다시 한번 점검·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일본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강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천황 아키히토와 헤이세이 일본사’는 전후 일본 정치체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상징천황제’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실상을 통찰할 수 있는 하나의 시사점을 준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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