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

경기일보 2024. 10. 11. 03: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윤영선 법무법인 광장 고문∙前 관세청장

 

■ 블라디보스토크 세관 통과하기

공항 세관은 익숙하지만 항구 세관인 해관(海關) 경험은 흔치 않다. 2천년 전 로마 시대부터 항구에 세관을 설치하고 수입품에 관세를 징수했다. 관세(關稅)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세금이다.

우리 일행은 여객선에서 가장 늦게 하선했다. 일행 중 한 명의 가방이 없어져 부두에 흩어져 있는 여러 짐가방을 뒤져 어렵게 찾았다.

문제는 사람과 짐가방이 아니라 자동차 통과였다. 통관 전문업자에게 위임했지만 최소한 5일이 걸린다고 했다. 러시아 세관 공무원에게 항의할 수도 없다. 자동차 여행에서 감수해야 할 기다림과 체념이다. 향후 열 번의 육상 국경의 세관 통과가 미리 걱정된다. 러시아 구간 운전에 따른 자동차보험 가입, 영어 표시 국제번호판 부착 등 준비를 병행한다.

다행인 점은 공통 경비를 보관 중인 일행의 짐가방이 세관검사에서 무사히 통관한 점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전쟁 제재로 달러와 신용카드 사용이 금지되고 사막 등 오지 통과 때문에 현금을 많이 가져갈 수밖에 없다. 세관 직원이 일행의 돈가방을 열어 보라고 했는데 위쪽만 살짝 보고 아래쪽은 확인하지 않아 모두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러시아 공무원은 생트집 잡기 등 악명이 높다고 여러 여행자에게 들었다. 1만달러 초과 세관 미신고로 처음부터 곤욕을 치를 뻔했는데 다행이다. 향후 교통법규 준수, 육상 국경 세관 통과 시 현금 분산 보관 등 큰 공부를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외곽 주택가에 설치된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일행과 기념촬영. 작가 제공

■ 연해주의 신한촌, 근현대 우리 민족 수난사의 현장

첫째 날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살았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독립운동가의 유적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처음 방문지는 ‘신한촌(新韓村)’ 기념탑이다. 스탈린에 의해 1937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한 조선인이 살았던 동네에 세워진 기념탑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북쪽 도시라 7월 날씨는 서울과 달리 덥지 않아 걸어가기로 했다. 러시아 키질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도로표지판은 도움이 안 된다. 낯선 외국 도시의 초행길임에도 휴대폰 구글맵을 켜고 걸어가니 큰 불편은 없다. 한 시간 걸어가니 약 90년 전 강제 이주된 조선인 거주지역이다.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마을인데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은 어느 단독주택 문 앞에 설치한 ‘서울거리’라는 작은 문패뿐이다.

서울거리 근처에 있는 신한촌 기념탑을 찾기 힘들어 지나가는 러시아 여성에게 물어봤더니 친절하게 기념탑으로 안내해 준다. 서민아파트 단지 모퉁이에 설치돼 있다. 그나마 철조망으로 막혀 가까이 접근은 안 된다.

기념탑의 기둥 셋의 의미는 ‘남한인, 북한인, 고려인’을 상징한다고 한다. 일행이 근처 공원에서 야생화를 따와 약식으로 헌화하고 위로의 묵념을 했다.

철문에 누군가 붙여 놓고 간 빛바랜 노란색 리본에 쓰인 문구를 읽으니 숙연해진다.

“조국의 후손임이 자랑스럽습니다. 대한민국이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한촌 기념탑 철문에 붙여있는 감사 편지 리본. 작가 제공

연해주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근현대 한민족 수난사의 대표적 사례다. 국가가 멸망하고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격동기, 조선 역사상 최대의 변혁기이며 경험해 보지 못했던 혼란기에 살았던 함경도, 평안도 주민들의 애환이다.

19세기 말기 조선시대 두만강 국경지대에 살았던 주민들이 관리의 폭정과 부패, 과도한 세금을 피해 두만강을 넘어 중국의 지린성, 러시아의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했다. 사람이 안 사는 황무지를 개척해 농사를 지어 생업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연해주지역은 청나라의 영토였는데 1860년 청나라가 서구 국가와의 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후 러시아에 빼앗긴 지역이다. 최초 이주는 1863년 두만강 근처의 13가구가 러시아 영토에 이주한 것으로 러시아 관리가 기록하고 있다.

19세기 말 연해주지역은 인구가 많지 않아 러시아는 조선인의 이주를 관대하게 대했다. 러시아인은 고려인을 ‘카레이스키’라 부른다. 고려 사람이라는 뜻이다. 1937년 가을 스탈린은 연해주지역에 살던 17만여명의 조선인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유대인과 같은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시작이다. 조국이 없는 망국의 국민을 지켜줄 사람은 없었다. 오늘날 약 50만명의 고려인 4세, 5세들이 중앙아시아,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다. 역사는 진행형이다.

강제이주 당시 신한촌에 아마 수만명이 살았을 것이다. 1930년대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대학, 중등학교, 많은 교회 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독립군에도 입대하고 상하이임시정부에 독립자금도 지원했다.

■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자택 방문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한일병합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일본 경찰은 총기와 자금 지원 등 배후를 캐기 위해 안 의사를 심하게 고문했으나 안 의사는 끝까지 자백하지 않고 이듬해 뤼순감옥에서 총살됐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아는 역사다. 안 의사에게 거사 자금을 지원하고 안 의사 사망 후 유가족을 보살펴준 사람은 최재형 선생이다.

최재형 선생이 살았던 건물 입구에 부착된 기념패. 작가 제공

안 의사는 거사 얼마 전 연해주에서 손가락을 절단했고 평소 최 선생 집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고 한다. 최 선생은 19세기 말 어린 시절 함경도 부모님을 따라 연해주로 가서 러시아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러시아어 실력으로 군납사업 등을 해 당시 가장 성공한 기업인이 됐고 교민사회 후원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최 선생은 1920년 일본군에 의해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체포돼 즉결 처형됐다. 최 선생 기념패는 러시아 정부가 세운 것으로 러시아어, 영어, 중국어 3개 언어로 돼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말 설명은 없다. 특히 영어, 중국어 등 이름 표기가 ‘최재형’이 아니고 ‘최재현’으로 잘못 표기돼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우리 영사관에서 향후 이름 오자도 바로잡고 한국어 설명도 추가해 다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념패 내용은 “최재형(1858-1920)은 한국의 애국자, 독립운동가, 지도자다. 1962년 한국 정부의 건국훈장을 수상했다. 한국 언어와 한국문화 보급에 힘쓰고, 러시아문화를 한국인에게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지난 6월 모 신문에 우즈베키스탄에서 어렵게 사는 최 선생의 외증손녀 주택을 KT와 국가보훈부가 고쳐줬다는 훈훈한 기사를 읽었다.

장장 6시간을 걸었지만 울림이 있는 첫날을 보냈다.

경기일보 webmaster@kyeonggi.com

Copyright © 경기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