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평범한, 법앞에 평등한 ‘부부’

김효실 기자 2024. 10. 10.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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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평등 소송’ 이유 물으니…
“법이 바뀌면 사람도 바뀔 수 있어”
“개인 선의에 기대기엔 제도의 벽 커”
“법이 인정하는 ‘안정적 결속’ 절실”
동성부부 11쌍이 혼인신고 불수리 불복 소송을 내기 하루 전인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그랜드컨벤션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 참여한 황윤하-박이영글 부부가 손을 잡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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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6년차 소성욱(33)씨는 2019년 아버지에게 결혼식 청첩장 건넨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했는데, 그 이유가 놀라웠다. “법적으로 인정도 안 되는데 뭐 하러 하냐.” 같은 남성인 김용민(34)씨와 결혼한다고 해서 반대하는 게 아니란 뜻이다. “그럼 법적으로 인정되면 결혼해도 되나요?” 아들이 묻자, 아버지는 “그땐 다시 생각해야지”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실용주의적’ 반대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이기지 못했지만, 성욱씨는 깨달았다. ‘사람이 법제도를 바꾸지만, 법제도가 사람을 바꾸기도 하겠구나.’

성욱·용민씨를 비롯해 한국에 살고 있는 부부 11쌍은 혼인신고를 했으나 동성 간 결합이라는 이유로 수리하지 않는 건 부당하다며 각 구청을 상대로 11일 집단 소송을 내기로 했다. 이성 부부와 같은 ‘결혼할 권리’, 법 앞의 평등을 요구하는 ‘혼인평등 집단소송’이다. 2014년 김조광수-김승환 부부가 같은 내용의 소송을 냈다 패소한 지 10년 만이다. 동성 부부 다수가 동시에 동성혼을 법적으로 인정해 달라며 소송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짧게는 2년, 길게는 24년 동안 함께 살아온 이들의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한겨레는 11쌍 가운데 3쌍의 부부에게 소송에 나선 까닭을 물었다.

왜 지금 혼인평등? 없애야 할 ‘차별’ 산적

박유안(24)·민다정(가명·35) 부부는 잔병치레가 잦은 유안씨가 갑자기 병원을 찾아야 할 때마다 법적 결속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병원에선 바로 옆 남편은 ‘법적 가족이 아니라 보호자 역할을 할 수 없다’며 ‘진짜 가족’을 데려오라고 해, 같이 살지 않은 지 꽤 된 엄마가 영문도 모른 채 먼 길을 달려오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동성 부부는 병원에서 ‘보호자’로 인정받지 못해 수술·입원 동의서에 서명할 수 없고, 치료 경과에 대해 설명을 듣지 못하기도 한다.

소성욱-김용민 부부가 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며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또 이성 부부와 다르게 국민연금 같은 사회보험, 주거 등 각종 사회보장 제도에서 배제된다. 자녀 출산과 양육권 행사도 마찬가지다. 정자를 기증받아 지난해 8월 딸 ‘라니’(태명)를 출산한 김규진(33)·김세연(36)씨 가족은 주민등록등본상으론 세대주(세연)와 동거인(규진·라니) 관계일 뿐이다.

세연씨는 직장에 ‘배우자 출산휴가’를 신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아이가 있으니 법적 안전망이 더 필요해요. 제(규진)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면 법원이 와이프에게 양육권을 줄지 알 수 없으니까요.” 이들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미래를 안정적으로 계획하려면 동성혼 인정이 필수라고 입을 모았다. 성욱씨는 “법적 권리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서로 돌보고 헌신하는 가족 관계라는 걸 공적으로 인정받고 가시화하는 게 꼭 필요하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혼인평등은 사회경제적 권리찾기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존엄 및 행복추구와 긴밀히 결합돼 있다는 의미다.

■ ‘시기상조’라고? 이미 변화는 시작

대법원은 지난 7월 성욱씨가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인 용민씨의 피부양자임을 인정해달라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성욱씨 손을 들어주었다. 대법원은 두 사람이 사실혼 관계처럼 생활공동체를 이뤘다고 보고 “성적 지향을 이유로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을 차별하는 행위”는 없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성끼리든 동성끼리든 ‘부부 공동생활의 실체’가 존재한다면 사회보장 제도에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동성 부부의 법적 지위를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었다. 성욱·용민씨는 부부 관계를 증명하고자 결혼식 사진·영상, 하객 방명록 자료는 물론, 두 사람이 공동으로 적금을 붓고 있음을 증명하는 은행 계좌이체 내역서까지 법원에 제출했다.

‘어차피 안 될 걸 알면서도’ 혼인·출생신고 등을 통해 사회적 차별을 드러내려 한 이들로 인해 인식도 점차 달라지고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해 5월 전국 만 18살 이상 1천명을 대상으로 동성혼 법제화에 대한 의견을 묻자 찬성한다는 응답은 40%였다. 찬성 의견은 2019년 35%, 2021년 38%에 이어 꾸준히 커지고 있다. 반면, 같은 기간 반대 의견은 2019년 56%, 2021년 52%, 2023년 51%로 감소 추세다.

김규진씨(왼쪽부터)가 딸 라니와 동성 배우자 김세연씨가 장난치는 모습을 보며 웃고 있다. 모두의 결혼 제공

동성 부부들이 체감하는 시민 의식도 법제도를 앞서간다. 규진·세연 부부가 자녀 양육을 하며 만난 산후·육아도우미, 어린이집 교사 가운데 두 사람을 이성 부부와 다르게 대하고 차별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오히려 공개 지지를 받는 일이 늘었다. 규진씨는 “같은 어린이집에 자녀를 보내는 한 학부모가 저희를 부모들의 브런치 모임에 초대하면서 ‘누가 뭐라고 하면 나한테도 말해달라. 같이 싸워주겠다’고 얘기했다”고 전했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규진씨는 신혼여행 휴가 등 결혼한 직원을 대상으로 한 사내 복지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용민씨는 지난 7월 대법원에서 승소한 소식이 언론 보도로 알려진 뒤 지금 사는 집을 구해준 부동산 공인중개사나 보험설계사로부터 축하 연락을 받았다. 유안·다정 부부는 2년 전 진도믹스견 ‘하리’를 입양할 때 “입양 보내는 쪽에서 동성 커플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안정적이지 못한 관계’라고 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소송에 기대하는 것

유안씨는 2021년 10월 법원 허가를 받아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된 성별을 여성에서 남성으로 정정했다. 그때의 경험이 그를 혼인평등 소송으로 이끌었다. “‘법이 나 이제 남자래’라고 하니까 오랜 친구, 새로 알게 된 지인 등 누구도 내 성별에 더는 토 달지 않았다. 법이 움직여야 사람들 인식이 바뀐다는 걸 그때 실감했다.” 지금은 다정씨와의 관계에 물음표를 던지는 이들이 많지만 “법이 우리를 부부라고 한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라 기대한다.

민다정(가명)·박유안 부부가 8일 서울 양천구 자택에서 반려견 하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규진·세연씨 부부는 아이를 키우며 하루하루 매 순간이 더 소중해졌다.성인끼리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것과 “지켜야 할 아이가 생긴” 상황이 같을 수 없어서다. 출산 전까지만 해도 언론에 얼굴·이름을 공개하지 않았던 세연씨는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국민들 인식만이라도 더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소송에 참여했다. “개개인의 호의와 선의에만 기대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큰 제도의 벽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사회를 바꾸기 위해 엄마들이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려고 해요.”(규진)

성욱씨는 “학교와 친구 관계에서 당당하거나 떳떳하기 힘들었던” 청소년기를 떠올리며, 청소년들에게 미칠 영향도 강조했다. “성소수자 부부가 법적으로 인정되고 이들을 이성 부부와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게 분명해졌을 때” 청소년 성소수자들도 숨통이 트인다. 뉴질랜드 오타고대학교 연구진은 2021년 발표한 논문에서 1991~2017년 동성혼을 법적으로 인정한 18개국의 청소년 자살률을 살폈다. 그 결과 법제화 당시에 비해 그 이후 청소년 자살률이 유의미하게 줄었다. 용민씨는 “동성혼 법제화는 국민들이 먹고사는 민생 문제일 뿐만 아니라, 죽고 사는 생명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최근 한 여성 커플의 결혼식에 갔는데 양가 부모님이 다 참여하고 어머니들이 축사를 해주셨어요. 그런데 두 어머니의 축사 모두 ‘한국에선 너희 결혼이 법적으로 인정도 안 되는데’로 시작해서 ‘너희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걱정되지만 축하한다’는 내용이었거든요. 동성혼이 (법적으로) 인정되는 사회라면 가족들이 그런 걱정을 묻어두고 온전히 축하할 수 있겠죠.”

2001년 법이 보호하는 세계 최초의 동성 부부를 탄생시킨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지난 20여년 동안 전세계 39개국이 동성혼을 법제화했다. 그러고서 ‘망한 나라’는 한 곳도 없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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