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휘의 시네필] 양극화와 소통불가능, 사극으로 우리 시대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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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던 정여립의 죽음으로 막을 연 영화는 때때로 창(唱) 소리의 운율을 타고 두루마리 그림 펼치듯 치고 달려 나가는 도입부를 통해 조선 중기의 시대상을 압축해 제시한다.
'전,란'의 핵심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며,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영영 평행선만 그리는 계급 간(間)의 소통 불가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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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시대극에는 모종의 역설이 따르기 마련이다. 완벽한 과거의 재현이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고,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정념이 역사의 어느 측면을 비추고 해석할 것인가를 결정짓는다. 따라서 창작자가 만약 어떤 프레임으로 역사의 풍경을 겨냥하고 조명한다면, 그 안에 담긴 것은 실제 기록대로 고증된 사실이 아닌, 오늘날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상(像)이자 정서적 리얼리티가 된다. 과거를 보여준다지만 실은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돌려서 하고 있는 것이다.
‘전,란’(2024)은 임진왜란 전후 시대상의 잘 다뤄지지 않았던 불편한 심연을 비춘다. 일치단결 합심해서 외적을 물리친다는 식의, 숱하게 반복되어 온 민족주의 서사의 정념은 여기에선 흔적도 없이 증발하고 없다. 대신 영화가 주목하는 건 조선 사회 내부의 모순과 비인간성이다. 조정에 종사하는 관료층을 가리키던 양반은 상민 위의 지배계급으로 고착화되었고, 노비의 신분은 대를 이어 세습됐으며 인권 수준은 턱없이 낮았다.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던 정여립의 죽음으로 막을 연 영화는 때때로 창(唱) 소리의 운율을 타고 두루마리 그림 펼치듯 치고 달려 나가는 도입부를 통해 조선 중기의 시대상을 압축해 제시한다. 일천즉천(一賤則賤)의 폐단으로 양인의 자식이 노비로 팔려 가고 가축만도 못한 노역과 학대에 시달리는 반면, 그들 희생의 대가로 안락을 누리는 양반층을 대비시키면서 천국과 지옥의 양극화로 찢어진 사회의 폐단과 분열상.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표면 아래 숨죽인 채로 쌓여가고 있던 민중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 부리던 노비들의 반란으로 이종려(박정민)의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데서 시작해 불길에 휩싸인 경복궁으로, 미시적인 데서 거시적인 영역으로 프레임을 확장하며 정점에 달한다.
천영(강동원)과 이종려의 신분 관계를 넘어선 우정이 불구대천의 원수로 바뀌는 개인 간의 고전적 비극은, 전혀 민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왕실의 안위와 위신만을 염려하며 의병장을 역적으로 몰고 무리한 공역(工役)을 강요하는 등, 일종의 소시오패스에 가깝게 묘사되는 선조(차승원)에 의한 사회적 비극과 겹치고 포개진다. ‘전,란’의 핵심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며,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영영 평행선만 그리는 계급 간(間)의 소통 불가능에 있다. 종국에 가서야 진실을 깨달은 이종려는 동무로서의 천영을 되찾지만 죽음을 맞고, 궁궐 재건에 충당할 금은보화를 기대했던 임금은 그제야 무능력한 국가가 초래한 참상의 증거를 목격하게 된다.
모든 구성원이 같은 민족(nation)을 단위로 한 하나의 국가 공동체에 속한다는 근대적 내셔널리티(nationality)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입각한 근세의 조선에선 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종려의 일가족이 천영을 비롯한 종들을 ‘짐승’처럼 대하지 않았다면, 조선이 유학의 이상이라는 대동(大同: 너와 나의 구분이 없이 전체가 하나 됨)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의 사회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외침에 허약하게 붕괴할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민족 개념의 부재는 현대의 한국에도 마찬가지라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허울일 뿐 오직 계급의 구분과 차별 그리고 소통 불가능만이 있는 것 아니냐는, 냉엄한 비판의 날이 사극의 껍데기 이면 아래 서늘한 빛을 발하며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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