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의료문화 본질 이해가 의정격돌 해법
1990년대 병원 전공의,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은 문자 그대로 고난의 수련이었다. 수면 부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쉴새 없는 연구 과제와 진료 계획 발표에, 환자 진료와 진료 보조에 이어 교수들과 상급 연차 전공의 선배들 잔심부름까지 거의 모두 도맡았다. 오직 의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그 같은 극한의 시간을 견뎌야 자부심 가득한 의사가 될 수 있었다.
그 무렵에는 전공의 뿐 아니라 대학교수도 밤잠을 잊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내 최대 규모 국제정형외과학 학술대회 사무총장 K 대학병원의 Y 모 교수도 연구실에서 손수 컵라면을 끓여 먹으며 밤새 일했다. 이미 명성이 자자했던 그도 말이다. 이 같은 우리 의사들의 헌신 위에 독특한 의료문화가 생성되었고 그 위에 한국 의료는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이같은 우리나라 특유한 의료 문화가 있어 장기간의 정부 강제 저수가 정책 하에서도 한국의 헬스케어 시스템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 자산이자 가치로까지 발돋움했다.
국내 활동중인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 전문가들이 여의도 모처에서 토론하는 자리에 청와대 미래전략비서관 등과 함께 했다. 토론 주제는 'What is Korean real asset and value?'였다. 예일대 출신 임마뉴엘 박사와 콜롬비아대 출신 의사 조엘 박사가 이끌었다. 두어 시간 이상 이어진 격론의 답은 '한국의 헬스케어 시스템'이었다. "값싸고 질 좋은 한국 의료가 가난한 작가와 예술가들의 창작열을 불태울 수 있게 했다. 적은 수입에도 아픈 노동자들이 가까이에서 언제나 이용 가능한 동네 병원과 의원이 있어 노동을 이어갈 수 있다"가 중론이었다.
국가 자산과 가치의 일등으로 손꼽힌 한국 헬스케어 시스템의 중핵인 우리 의료가 뿌리 채 흔들리고 있다. 의사를 싸잡아 악마화하고 카르텔 집단으로 규정하여 강행 중인 의과대학 정원 2000명 증원에서 시작된 일이다.
막상 어떤 정부기관과 정책당국자도 명확한 산출 근거와 합의과정 조차 밝히지 못하면서 왜 이럴까? 심지어 전공의를 구속하고 모든 공권력을 동원할까? 과연 국민을 위해서일까? 의과대 정원 증원이 의료개혁의 핵심사안이라는데 옳은가? 당사자 격인 의사들이 죽어라 반대하는 것에 일언반구 않고 시행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것일까?
이제껏 이해와 동의가 되지 않는 수많은 제도와 정책 하에서도 꿋꿋이 한국 의료를 떠받쳐 온 한국 의사들의 의료 문화를 조금만 이해해도 못할 짓들이 이어져왔다. 지금은 이전에 비하면 전공의 근무여건과 급여가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혹사당하는 전공의 수련 환경이 정부 의과대학 정원 증원과 일대 충돌의 가장 큰 원인이다.
의정 격돌 과정에 자신의 환경과 처지와 마음으로는 어쩔 수 없이 병원 현장에 남아야 했던 전공의, 남아야 하는데 남을 수 없어 집으로 돌아간 전공의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고통과 좌절의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본다.
생계수단이 끊긴 고통을 못 이기거나 정신적 충격에서 헤매는 피해 전공의들이 적지 않다. 지난 1차 전공의 파업 때 동참하지 않았던 일반외과 레지던트 A는 이번에는 사직서를 던졌다. 요즘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4억 급여 의사로 치부하고 있지만 의료 현장의 전공의와 사직 전공의 모두가 치료해야 할 의사에서 치료 받는 환자가 됐다. 대학병원 교수들의 고초와 핵심 교수 인력의 사직 행렬도 묵과할 수 없다.
작금의 의과대학 정원 증원은 과반 세기 넘게 애써 일구어 온 한국 의료문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도려내고 오려내어 시스템으로 만들겠다고 나섰다. 문제는 한국 의료를 문화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데 있다.
의사와 병원의 내부는 일반 직업 사회, 조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의사와 의료를 한마디로 단순 명쾌하게 말하기 어렵다. 시스템이 아니라 문화적인 면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척박한 의료현실에서 배태된 이 특질을 이해해야 우리 의료의 미래를 제대로 제시할 수 있다. 가까스로 한국 의료문화에서 자라기 시작한 미약한 의료시스템조차 일시에 붕괴시키는 의과대 정원 증원 강제화는 즉각 멈춰야 한다. 이제까지의 한국 의료문화가 붕괴된다면 백약이 무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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