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와 평화 둘레길 [안병욱 칼럼]
안병욱 |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지난 9월23일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서 ‘코리아 둘레길’ 전 구간 개통식이 열렸다. 동해안의 해파랑길, 남해안의 남파랑길, 서해안의 서해랑길에 이어 비무장지대(DMZ) 남쪽에 35개 코스, 510㎞에 이르는 평화의 길이 만들어졌다. 남한 땅을 한바퀴 삥 둘러 걸을 수 있는 길이 완성됐다.
비무장지대는 군사분계선을 따라 남북으로 각기 2㎞ 거리로 설정된, 군사 충돌을 방지하려는 완충지대이다. 한반도가 6·25전쟁으로 생지옥 같은 참화에 휩쓸린 이래 그 상처로부터 아물지 못하고 덧난 상태로 놓여 있는 곳이다. 시초는 1945년 한장의 지도 위에 저주스럽게 그어진 선이었다. 미국은 패전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서두르던 작전 회의 석상에서 한반도를 놓고 미처 30분도 안 걸린 시간에 두쪽으로 분할해 버렸다.
돌이켜보면 유럽인들은 마름질하듯이 쉽게 남의 땅에 줄긋기 했다. 아프리카를 그렇게 쪼갰고 아메리카 대륙을 그렇게 나누었다. 그들에게는 자연 지형을 이용하거나 행정구역이라도 챙겨보려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었다. 사람들의 오랜 생활 터전이 지도 위에서 한낱 연필 끝으로 그어진 직선을 통해 억지로 구분되고 통제될 수 있겠는가. 필경 분쟁과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급기야 골육상쟁(骨肉相爭)의 한반도가 만들어졌다. 3년 전쟁을 통해 150만명의 사망자와 400만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초래한 뒤, 지금 남겨진 것은 두 동강 난 국토와 그 중앙에 놓인 열겹도 넘는 철조망 장벽으로 둘러쳐진 비무장지대이다.
한반도 비무장지대 설치 제안은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 않을까 우려한 영국이 처음 내놨다. 미국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북한군 점령하의 남한 지역을 수복하고 1950년 10월1일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북한 전역을 점령할 기세였기 때문에 군사적 승리를 통한 전쟁 종식을 노리던 참이었다. 당시 영국은 중국 참전으로 자칫 또다시 세계대전에 휘말리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완충지대 설치를 제안해 미국과 중국의 강경 대결을 중재하려고 했다. 처음 영국이 상정한 비무장 완충지대는 동해안의 흥남에서 서쪽 정주까지 가로지르는 지역으로부터 북쪽으로 한만국경(북-중 국경)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다.(‘DMZ의 역사’, 한모니까. 2023)
1950년 11월 중국 참전으로 유엔군 진격이 막혔고, 12월에는 중국군이 미 8군을 추격하면서 38선까지 내려왔다. 미군은 방어선을 구축해서 불리한 전황을 되돌려야 할 상황이었다. 그즈음 미국은 아시아의 인도를 비롯한 13개국이 유엔 총회에 한국전쟁 정전 결의안 제출을 위해 결성한 엔테잠 위원회에 ‘38도선 이북에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폭 20마일(32㎞)의 비무장 완충지대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중국은 전황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이러한 정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 전역을 탈환한 북·중 군대는 1951년 1월 서울을 다시 점령했지만 더는 진격하지 못했다. 오히려 유엔군이 서울을 다시 탈환했고, 전선은 38선 인근에서 교착됐다. 정전회담은 어느 일방이 군사적 해결을 낙관하던 상황에서는 진척되지 못했으나, 이렇게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양쪽 모두 군사적 수단에 의한 해결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을 때 진행됐다. 이 논의에서 한국 정부의 의견은 배제됐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1년 만에 휴전 논의가 이루어졌고 정전회담 본회담은 1951년 7월10일 시작됐다. 중도에 가조인(假調印)한 초안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전투를 계속한다’라고 했다. 곧 서로 합의해 1년6개월을 더 싸운 뒤에야 비로소 휴전했다.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직전 넉달 사이 서로 최대의 포탄을 퍼부었다. 그 기간에 공산군은 13만5천여명의 사상자를, 유엔군 쪽은 6만5천여명의 사상자를 내, 모두 20만여명을 한뼘의 땅 위에다 처참히 희생시켰다. 38선으로 쪼갤 때는 30분의 시간도 길게 느꼈던 그들이 살상행위는 2년이나 끌면서 인명을 희생시켰다. 전투하기 위해 존재했던 시대였다.
1953년 8월에 전체 250㎞ 군사분계선에 표식물 말뚝을 지형에 따라 식별 가능한 간격으로 총 1292지점에 설치함으로써 정전협정 지도상에 그려졌던 군사분계선이 현장에 표시됐고 비무장지대 남북 경계선이 만들어졌다. 1973년에 표식물 교체작업 중 북한군의 총격으로 남측 인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뒤로 지금까지 보수 유지 작업이 중단됐다. 사실상 현장은 설치된 표시물이 대부분 퇴락된 채 없어졌으며 지뢰와 온갖 무기들로 둘러싸인 가장 위험한 지대가 됐다. 세계대전 예방을 위해 제안된 비무장지대가 지금은 일촉즉발의 위험지대로 변해 세계대전을 불러올 가장 첨예한 발화점이 되어 있다.
이런 긴장 상황에서 남북은 2000년 6·15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2007년 서해평화협력지대 설치에 합의했다. 2018년 9월19일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비무장지대를 비롯한 대치 지역에서 군사적 적대관계 종식과 전쟁위험 제거를 위한 조치에 합의하면서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 서해 평화수역 조성 등을 실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남과 북은 비무장지대 안 감시초소(GP)의 완전 철수를 목표로 우선 충돌 위험성이 높은 초소 각각 10개씩의 장비와 인력을 철수하고 해체했다. 지혜를 모아 참으로 어렵게 합의해 추진한 평화실천이었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은 한순간 이를 파기했다. 해체된 지피도 예전보다 더 늘려서 15개나 복원작업 중이라고 더불어민주당 박선원 의원이 며칠 전 정부 자료를 이용해 밝혔다. 현 남북 당국자들은 각기 내부 취약한 입지를 호도하려는 방편에서 비무장지대의 대립 갈등을 조장하고 예전보다 더 심각한 긴장 관계로 내몰아가고 있다.
그렇게 군사분계선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억울한 국경으로 굳어갈 것인가. 나는 오늘 우리가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동서독의 분단선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자리를 답사하듯이 미래의 어느 날에는 우리 후손들도 어리석은 지금의 죄상을 곱씹어 역사의 교훈으로 새기면서 답사하리라 확신한다. 지금처럼 비극의 땅이 건너다보이는 둘레길이 아닌, 한때 군사분계선이었던 길을 따라 장차 조성될 남북통일의 순례길을 걷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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