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환의 두잉세상] 東明 강석진 선생의 40주기를 기리며
오는 29일은 동명(東明) 강석진 선생 서거 40주년이 되는 날이다. 선생은 5공 신군부의 동명그룹 강제 해체, 재산 전액 몰수와 함께 악덕 기업이란 누명을 씌운 것에 충격을 받아 향년 7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신군부는 50여 년간 정의와 계획을 사훈으로 동명목재를 경영하며 기업보국과 교육입국에 헌신한 선생을 욕보였다.
2008년 10월 22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신군부의 강압에 의해 동명그룹이 강제 헌납됐다”고 밝혀 선생의 명예는 회복됐다. 하지만 선생이 더 오래 사셨더라면 필생의 꿈인 기업보국과 교육입국에 더 많은 일을 하셨을 텐데 참으로 애석하다.
1907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선생은 14세 때 부산에 와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구점에서 일하다가 독립, 1925년 부산 좌천동에 동명제재소를 설립했다. 동명제재소는 1949년 합판 생산라인 구축과 함께 훗날 동명그룹의 모체가 되는 동명목재상사로 이름을 바꿨다. 동명목재는 1961년 합판을 수출하는 등 성장을 거듭해 1960~70년대 한국 수출을 이끈 대표 기업이 되었다. 동명목재는 1968년부터 3년간 한국에서 가장 많은 수출을 한 기업이었다. 합판은 1961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의 10대 수출 품목이었고, 1977년에는 합판으로만 1억 3500만 달러를 수출해 단일 품목으로는 최대를 기록했다.
선생은 부산 용당동 210만 평의 부지에 연 면적 5만여 평에 이르는 단일 품목 기준 세계 최대의 공장을 지어 부산경제를 이끌었다. 동명그룹의 종업원은 한때 최고 1만 명에 이르렀고 연 매출액은 500억 원에 달했다. 선생은 1967년부터 1976년까지 부산상공회의소 6~8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금융이 무역을 뒷받침하도록 1967년 부산은행, 1973년 부산투자금융을 설립했다.
14세의 가구점 점원이 40여 년 만에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창의성과 사명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모든 걸 다 바친 직업정신’ 때문이었다. 선생의 인생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익히기 위한 정진의 연속이었고, 즐겨 썼던 백번 천번 갈고 닦는다는 백련천마(百鍊千磨)에 의지를 담았다. 선생은 배우고 익힌 것을 부지런히 갈고닦으면 지식과 기술의 향상을 가져온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동명목재의 모든 출입구에 ‘기술’ ‘연구’라는 팻말을 붙여놓고 직원들에게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술개발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선생은 “오늘의 동명을 있게 한 것이 부산이요, 부산이 있었기에 강석진이 있게 되었으니 어찌 부산을 잊을 것인가”라는 말을 실천했다. 한 번은 동명산업에서 바둑이표 페인트를 생산했을 때 회사가 더 잘되려면 동명산업 본사를 서울로 옮겨야 한다는 참모들의 건의를 “작은 계열기업이라도 서울에 올라가면 동명목재가 서울에 올라가는 것과 같다”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생의 교육과 사회봉사는 1964년 청소년 선도와 보호가 목적인 BBS 운동을 이끌면서 시작됐다. 선생은 사재를 털어 만든 부산 BBS회관에 야간학교 강좌를 개설해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자식처럼 보살폈다. 선생의 도움으로 자립해 공부를 이어간 학생들은 선생을 ‘BBS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부산대학교 육성회 회장도 맡았다.
선생은 동명목재 직원의 항구적인 복지 증진과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을 위한 최선의 길은 교육이라고 여겨 1977년 동명문화학원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올랐다. 동명문화학원의 건학 정신은 ‘내일의 조국 번영과 인류 복지 증진에 공헌 봉사하여 천부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유능한 후진을 기르는 것’이었다. 선생은 서울의 공과대학을 인수하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1978년 동원공고, 1979년 동원공전을 개교했다. 동원공고 개교식에서 “학문적 이론 위에 훌륭한 기술을 갖춘 사람만이 참된 문화인, 참된 지식인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어서 학문과 기술을 중시하는 실업계 학교를 세웠다”고 말했다. 선생은 학생들의 바른 마음을 중시했다. 한 번은 신문사 기자가 학교 건물을 지을 때 왜 문과 나무가 바른 것에 관심을 기울이느냐고 묻자 “문이나 나무가 삐뚤어지면 학생들의 마음이 삐뚤어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동원공고와 동원공전은 선생이 타계한 1년 뒤 선생의 아호를 딴 동명공고와 동명전문대로 개명했다. 지금의 동명대학교는 동명정보대학교(4년제)와 동명대학(2년제. 구 동명전문대)이 통합해 2006년 개교했다. 선생은 육영을 필생의 업으로 추진하고 교육계에서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어했다. 선생은 육영 의지를 유산 전부를 동명문화학원에 기증한 것으로 보여줬다.
선생의 유지를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2008년부터 동명대상(東明大賞)을 제정해 부산과 국가 발전에 공적을 이룬 인사에게 시상하고 있다. 동명대학교도 도전·실천·체험이 핵심 가치인 Do-ing(두잉)교육으로 선생의 교육입국을 이어가고 있다. 백련천마의 자세로 인재 육성의 길을 가는 것은 선생의 유지를 받드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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