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가 진짜를 뒤덮은 가상의 시대 30여년

노형석 기자 2024. 10. 1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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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 개인전 ‘핑크 모먼트’ 현장
정소연 작가가 1997년 만든 초기 대표작 ‘인형의 집’ 연작 2점도 성곡미술관 전시장에 나왔다. 왼쪽 작품은 작가가 당시 약혼식 때 입었던 서양 스타일 드레스와 하이힐을 직접 만든 대형 바비 인형 비닐 포장 세트에 그대로 넣은 것으로 ‘인형 옷―약혼’이란 부제가 달렸다. ‘인형 옷―새색시’란 부제를 단 오른쪽 작품 역시 당시 결혼한 작가가 신혼 시절 입었던 한복과 색동 고무신을 바비 인형 포장 세트에 넣어 소재로 활용했다. 노형석 기자

24년 전 헤어졌던 분신 같은 작품을 다시 만났다.

1997년 자신이 약혼식과 결혼식에 실제로 입었던 예복을 소재로 만든 ‘인형의 집’ 연작 2점이 작가가 전시하는 미술관에 나타났다. 정소연(57) 작가는 “27년 전의 나 자신과 새롭게 만나는 느낌”이라고 했다.

전시장 안쪽 벽에 붙은 왼쪽 작품은 약혼식 때 입었던 서양 스타일 드레스와 하이힐을 직접 만든 대형 바비 인형 포장 세트에 그대로 넣은 것이다. ‘인형 옷―약혼’이란 부제가 달렸다. 오른쪽 작품은 작가가 결혼식과 신혼시절 입었던 한복과 색동 고무신을 바비 인형 포장 세트에 넣은 것이다. 두 연작은 2000년 한 갤러리에서 사간 뒤 거의 나오지 않았다가 작가의 30년 작업 이력을 갈무리하는 회고 전시에 나왔다. 작품 창작 뒤 이혼하고 싱글맘으로 작업을 지속한 그에겐 각별한 감회를 일으키는 작품이다.

지금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 2관에서는 지난 8월29일 시작한 정 작가의 회고기획전 ‘핑크 모먼트’가 열리는 중이다. 30년간 회화, 비디오, 설치, 영상 등 여러 장르에서 가상의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는 시대적 현실을 투영하며 이미지의 충돌과 어울림, 이미지들 배후의 권력과 편견 등을 탐구해온 작품세계를 살펴보는 전시다.

돋보이는 출품작 중 하나인 ‘인형의 집’ 연작은 바비 인형에 입혀진 전형화한 드레스와 한복 실물 이미지를 통해 서구 자본주의 문화에서 상품화를 피할 수 없는 여성의 이미지적 숙명을 보여주면서 당대 한국 생활 문화에서 서구형 외모와 의상에 대한 추종적 양상까지 짐작하게 한다.

작가는 실제와 가상, 현실과 환상 같은 현대문명 사회의 시각적 화두를 붙잡고 사진 프린트 연작과 미디어아트에 10여년간 진력했다. 세수하는 물 위 자신의 흐릿한 모습을 투사하거나 말년 병석 조모의 표정을 담은 영상을 복제하고 또 복제하는 등 90년대 말~2000년대 초 영상 작업들에서 흐릿해지거나 존재감이 말소된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자의식이 엿보인다.

작가가 2015년 그린 유화 작품 ‘포스트네버랜드2’. 식물도감에 나오는 지구 각 지역의 다기한 식물 이미지들을 컴퓨터 포토샵의 디지털 공간에서 한데 모은 뒤 그 모습 자체를 사생해 유화 물감으로 공들여 그렸다. 노형석 기자

주목해야 할 것은 2010년대를 기점으로 디지털화한 가상 이미지들을 유화로 붓질해 재현하는 아날로그 작업에 공을 들인다는 점이다. 세계적인 카드 업체 미국 홀마크의 카드 이미지나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 식물도감 연작들의 이미지를 컴퓨터 포토샵으로 디지털 화면에 모아놓은 뒤 공들여 재현하는 작업들이 전시실 상당수를 메우고 있다.

작가의 2015년 유화 작품 ‘포스트네버랜드2’는 식물도감에 나오는 지구 각 지역의 다기한 식물 이미지들을 컴퓨터 포토샵의 디지털 공간에서 한데 모은 뒤 그 모습 자체를 사생해 유화 물감으로 공들여 그렸는데, 찌그러진 모양새의 화폭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1층 들머리에서 만나는 설치 영상 신작 ‘언캐니가든’도 하루에 해가 떠서 질 때까지 하늘의 변화를 불과 10여분 만에 압축해 보여주는 영상이 인공 꽃들 위로 펼쳐지는 광경이 아날로그 수작업으로 배치돼 있다.

작가는 디지털 시대에도 유용한 실제와 가상이란 화두를 30년 동안 붙잡고 작업해왔다. 디지털 문명의 전환이 더욱 가속화하는데도 가상적 이미지를 디지털로 생산하지 않고 정작 아날로그적인 유화 작업이나 손과 몸을 쓰는 영상 설치 방식으로 작업해왔다는 점이 특이하다.

왜 이런 방식을 쓰는가. 어릴 적부터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디즈니와 홀마크 같은 미국 가상 문화에 익숙해지며 성장했던 작가 자신의 의식과 몸에 밴 기억과 역사의 고리가 연결돼 있다는 점을 부러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차별적이다. 이 시대 인간에 대한 성찰이 색다른 코드로 바탕에 깔려있다.

여성의 성기 같지만 눈동자를 깜박이면서 유기적인 인체 기관으로서 눈의 존재감을 발산하는 독특한 연속 사진 이미지를 담은 ‘욕망을 보는 눈’(1998) 등에서 작가의 섬세한 인간적 감성과 인간의 행위 기억에 대한 관심과 연민을 느낄 수 있다. 27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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