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된’ 몸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쉰 살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의 첫날, 여느 때처럼 둔근, 햄스트링이 멋지게 드러나는 반바지를 입고 짧은 사이클링을 즐기던 크리스티나 크로스비는 자전거 앞바큇살에 나뭇가지가 걸려 노면에 처박혔다. 5번과 6번 경추가 부서졌고, 부러진 뼈에 척수가 긁혔다. 척수 손상으로 다리 근육, 몸통, 팔, 손 근육을 쓸 수 없게 됐다.
이 사고로 시작하는 크로스비의 ‘와해된, 몸’(최이슬기 옮김, 에디투스 펴냄)은 여느 장애 회고록과는 다른 길을 간다. 잃어버린 신체 능력으로 좌절과 낙담을 거쳐, 해결책을 찾고, 만족과 기쁨을 발견하는 순차적 서사는 이 책에 없다.
크로스비는 사고로 “난파된” 자신의 몸에 종횡무진 깊숙이 들어간다. 사고 직후 한때 턱이었던 뼛조각들을 핀으로 고정한 금속성 이물감을 기억한다. 음식을 밀어 넣는 튜브를 삽관하면 “입과 목구멍에 점액이 가득”하고 “걸쭉한 액체 때문에 숨 쉴 때마다 익사할 것만” 같다. 몸이 바삭바삭 타들어가는 듯한 신경계 통증에 비명 지르며 언어가 와해됨을 느낀다.
사고 뒤 11년째, 통증은 삶의 배경으로 물러나지만, 늘 통증이라는 잠수복을 입고 있는 것 같다. 때때로 전기로 타올라 쪼그라든 식품용 랩처럼 느껴진다. 약물 개입 없이는 잘 수 없다. “나약한 괄약근”으로 인해 똥오줌과 맺는 새로운 관계는 매번 새롭다.
‘와해된, 몸’으로 더 깊은 연결들을 깨닫는다. 아무리 필사적으로 일해도 저임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간호조무사 도나는 욕조에서 침대까지 열 단계를 거쳐야 하는 크로스비의 이동을 전문적으로 성심껏 돕는다. 퇴원 직후, 휠체어에 앉은 상태에서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그를 여러 친구들이 돌아가며 방문해 이쪽저쪽 기울여줘 욕창이 생기지 않았다. 집 뒷베란다에는 주변인들이 라자냐, 키슈, 카레, 수프 등을 놓아두어 그를 돌보던 연인 자넷이 쇠약해지는 것을 막았다.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돌봄노동/가사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해야 함을 수도 없이 역설한다.
크로스비는 미국 웨슬리언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며 대학 내 여성학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 페미니스트로서 여러 글을 써왔다. 2003년 사고로 맞닥뜨린 척수 손상은 그를 매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한가운데로 데려갔지만, 그는 글쓰기로 그 시간을 직면하고 통과했다. 2016년 이 책을 펴냈고, 2021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91쪽, 1만8천원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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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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