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그때도 비평가들이 틀렸다, 오즈 야스지로의 명작 '동경의 황혼'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93번째 레터는 9일 개봉한 영화 ‘동경의 황혼’(1957)입니다.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1903~1963)의 마지막 흑백 영화인데요, 국내에서 정식 개봉하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 봤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었어요. 초연하면서 무정한 아름다움의 정수라고나할까요. 최근 허다한 영화들을 의무감에 보면서 어지러워졌던 눈과 맘이 이 영화로 정화됐습니다.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까지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다니. 아니, 왜 이런 영화가 개봉 때 그렇게 많은 평론가들의 욕을 먹었는가! 70년 전 평론가분들께 안타까움을, 오즈 감독님께는 뒤늦게 심심한 위로를 드리면서, 이 영화를 처음 들었다 하시는 분들도 이해하실 수 있게 얘기드려볼게요.
오즈 야스지로하면 아마도 ‘동경이야기’(1953)를 더 많이 들어보셨을 거에요. 대표작이죠.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 때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초청된 허진호 감독께서 “저의 초창기 연출작에 ‘동경이야기’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소개하셔서 상영도 됐습니다. “영화가 이렇게 삶의 깊이를 다룰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도 하셨고요. 야쿠쇼 코지가 주연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주인공 이름이 히라야마인 것도 감독 빔 벤더스가 ‘동경이야기’를 좋아해서 거기 배역을 따라서 붙인 거라고 하더군요. 오즈 야스지로를 존경한다는 감독은 이외에도 매우 많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아키 카우리스마키, 허우 샤오시엔, 짐 자무시 등등. 열거하기 입 아플 정돕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궁금하시다면 ‘동경이야기’를 보셔도 되지만(’동경의 황혼'과 동시에 9일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 ‘동경의 황혼’도 눈여겨 봐주세요. 전 ‘동경이야기’보다 ‘동경의 황혼’이 더 좋았거든요. 어떤 점에서 그랬느냐. 여러분이 이 영화가 궁금해서 포털에 검색하시면 ‘그의 작품 중에서도 예외적 스타일이 집약돼 있다’는 문구가 복붙하듯 나올텐데요, 근데 정작 뭐가 예외적이라는 건지 얘기가 없어요. 답답하시죠?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일단 어둡습니다. 네, 화면이 어둡고요, 분위기도 약간. 어두움은 계절과도 연관됩니다. 오즈 영화는 대부분 봄이나 여름, 가을까지인데요, 이 영화는 드물게 겨울이에요. 오즈 작품은 주로 환한 화면이 많아서, 슬픈 상황에서도 밝음이 드러났는데, ‘동경의 황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슬퍼서 슬퍼요. 그렇다고 슬픔으로 몰아세우지도 않고요. 저는 그래서 좋았습니다.
문제는 이런 예외적인 스타일이 그 당시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거죠. 평론가들이 “아니 이건 뭐냐”고 하도 혹평을 해서 오즈 감독님이 엄청나게 충격을 받은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스로 “‘동경의 황혼'은 실패작”이라고 하셨다네요. (아, 감독님 절대절대 아닙니다. 이런 영화가 어찌.)
그럼 ‘동경의 황혼’은 무슨 얘기냐. 은행원 아버지가 주인공이고요, 큰딸은 남편과 별거 중인데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와있습니다. 작은딸도 있는데, 지금 큰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남자친구가 날건달이에요. (그런데도 좋아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참 알 수 없는.) 문제는 임신을 했다는 건데, 남친은 “내 애가 맞기는 하냐”며 시큰둥합니다. 아버지의 부인, 그러니까 두 딸의 어머니는 안 보입니다. 여기에 가족의 비밀이 있는데, 옛날에 어머니가 가족을 버리고 떠났거든요. 남편의 부하직원과 눈이 맞아서요. 작은딸이 워낙 어릴 때 생긴 일이라 어머니 얼굴도 기억 못하는 걸로 나옵니다.
그런데 아니 이런, 이 어머니가 도쿄에 나타납니다. 큰딸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자신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미워하고요. 작은딸은 중절 수술비를 구하러 돈을 빌리러 다니고, 남친의 친구들은 마작집에 모여서 그녀의 비밀을 마른 안주 씹듯 질겅질겅 씹어제낍니다.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요. 그건 영화관에서 보시면서 짚어내시길.
이 영화에는 외롭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가족이라지만 작은딸은 임신 중절이라는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서도 누구하고도 고민을 나눌 수 없습니다. 큰딸이 아버지에게 작은딸을 언급하면서 반복하는 말이 있어요. “외로워서 그런 거에요.” 그런데 이 말은 큰딸에게도 들어맞거든요.
작은딸은 나중에 말합니다. “나, 다시 시작하고 싶어. 내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인물은 도쿄를 떠나는 기차에 앉아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설마 오겠지 하면서요.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영화 끝부분에 나오는데, 카메라 시선 처리나 사운드가 절묘해요. 기적 소리, 플랫폼의 웅성거림만 들으면 기대하던 일이 일어날 것 같거든요.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영화가 우울하다고 하는 평도 있는데, 글쎄요, 저는 오즈가 무조건적인 긍정도 하지 않지만 마냥 부정적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사에도 나와요.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든 살아봐야죠.” 국내에 발매된 오즈 감독님 책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힘낼 만큼 힘을 내봤다. 제법 또 힘을 낼 수 있었다.’ 확신도 아닌, 미련도 아닌, 그렇다고 체념은 더더욱 아닌.
‘동경의 황혼’의 주연 배우인 류 치슈와 하라 세츠코는 오즈 영화에 늘 나오는 배우들이에요. ‘동경이야기’에도 나오고요. 류 치슈는 오즈 영화에서 자주 하는 대사가 있는데 ‘소우데쓰까’ ‘소우데스네’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군요. 슬퍼도 놀라도 답답해도, 늘 똑같은 반응입니다. 오즈 감독님 본인이 그렇지 않았을까 짐작이.
제가 앞서 이 작품을 아름답다고 말씀드렸는데, 전 보면서 내내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생각났습니다. 흑백 좋아하시고 플래시 혐오하신 프랑스 사진작가. 까르띠에 브레송의 작품이 고요하면서 주도면밀한 구도로 끌어당긴다면, 오즈는 고아하고 무심한 시선으로 사로잡는다고나 할까요. 흑백이라서 가능한 것 같습니다. 오즈는 생전에 “흑백을 사용할때조차도 나는 항상 색조와 분위기에 관심을 가졌다”라고 했는데, 요즘의 그 어떤 대단한 컴퓨터 그래픽으로도 이런 느낌은 못 잡아낼 거 같아요. 바라보는 이의 정서가 카메라 초점에 맺히지 않으면 불가능한 화면입니다.
예를 들어서, 위의 장면을 한 번 보세요.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오즈 야즈지로와 늘 함께 언급되는 ‘필로우 샷’(pillow shot)입니다. ‘동경이야기’도 그렇고 ‘동경의 황혼’도 그렇고, 오즈 영화엔 내용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풍경샷이 수시로 들어가는데, 서사 구조와 상관없이 들어간 이런 장면을 ‘필로우 샷’이라고 합니다. 기차가 지나가고, 시계가 째깍거리고, 모자가 걸려있습니다. 필로우라니, 영화 얘기하면서 왜 베개냐. 의미없는 수식어를 ‘마쿠라코토바’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마쿠라’ 즉 베개만 따와서 만든 단어라고 합니다. 저도 궁금해서 찾아봤어요.
필로우 샷이 오즈 감독의 인장이다보니, 여러분이 ‘동경의 황혼’에서 많이 보시게 될 것이 간판입니다. 한 영화에서 간판을 이렇게 많이 본 게 첨인 것 같아요. 정말 많은 간판을 보실 수 있는데요, 전체를 다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위나 옆을 자른 듯 부분을 슬쩍 보여주는 간판이 자주 나옵니다. 일부에서 잉여 샷이라고 하는데 이 샷들이 있어서 인물들의 등장 전후가 각인된다는 점에서 잉여는 아니겠고요. 오즈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필로우 샷이 주는 여운이 오히려 서사를 주도하는 느낌이 드실 거에요.
독자분이 만약 영린이시라면, 오늘 레터에서 다른 건 기억 못하셔도 ‘오즈 야스지로, 필로우 샷’ 이것만 알아가셔도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한 번 아시고 나면 이게 얼마나 자주 나오는 단어인지 놀라실 거에요.
아, 나가기 전에 한 장면 더. 주인공인 은행원 아버지가 할아버지이기도 하거든요. 큰딸이 자식이 있어서요. 그래서 집에 애가 갖고 노는 딸랑이가 있어요. 영화 끝부분에 주인공이 그 딸랑이를 잠시 흔들어보이고 집을 나섭니다. 물론 이어지는 엔딩은 역시 명작이기에 가능한 여운을 남기는데요, 그 딸랑이를 배신한 아내(큰딸의 어머니)가 만지는 장면이 훨씬 전 시퀀스에서 나와요. 아주 잠깐 스쳐가서 혹시 못 보실 수 있는데, 영화 보시다가 아내가 집에 찾아오는 장면이 나오면 눈여겨봐주세요. 딸랑이 하나로도 이렇게 관계를 드러내는구나, 이제는 서로 아무 것도 아닌 관계, 한때의 정념과 미움을 공유할 뿐인 남남임을 이렇게 보여주는구나, 감탄했습니다.
오즈는 자신의 환갑날 숨졌는데, 묘석에 ‘무’(無)라는 한 글자만 새기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네요. 제가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는데, ‘동경의 황혼’에서 큰딸로 나온 하라 세츠코를 오즈가 짝사랑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라는 오즈가 죽고 바로 은퇴해서 이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네요. 하라도 독신이었대요. 둘 사이의 어떠한 사연이 있는지 혹은 없는데 후세에서 억측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두 분이 남긴 영화가 70년을 건너와 우리 곁에서 만남을 기다리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랜만에 영화에 몰두하는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작품이에요.
아래에 붙이는 동영상은 ‘동경이야기’ 예고편인데요, 배급사에서 ‘동경의 황혼’ 예고편을 안 만들어서요. 하…. 여러 감독들이 오즈 야스지로에게 바치는 상찬이 나열되는데 참고로 보세요. 그럼,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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