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송 즉시 버린다…‘딜리버-스루’ 시대[쓰레기 오비추어리②]

유정인·이홍근 기자 2024. 10. 1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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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창간 78주년 기획
초저가로 163건 사서 63건 폐기
‘버릴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
생산·마케팅 “산업 전반이 불필요한 소비 부추겨”

서울에 사는 A씨(37)는 지난 4월 4일 중국 전자상거래사이트 ‘타오바오’에서 옷 12벌과 양말 10켤레를 주문했다. 민무늬 긴팔 상의는 흰색 2벌, 검정색 2벌, 파랑색 1벌 등 총 5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한 벌에 35위안(6600원)이라 부담은 느끼지 않았다. 재질이 조금 다른 상의는 노랑·분홍·회색으로 3벌, 무릎 위로 오는 치마는 검정색과 회색으로 2벌을 골랐다. 5개월이 지난 9일 현재 12벌 중 9벌은 폐기됐다. 색색으로 산 상의 8벌은 모두 버려졌다. 일부는 배송 직후였다.

국내외 초저가 전자상거래 플랫폼 이용이 일상화하면서 새로운 소비·폐기 패턴이 확산하고 있다. 동일 물품을 색상과 사이즈를 달리해 주문한 뒤 맞는 것을 추리거나, 입을 수 있을지 애매한 디자인을 일단 주문해보는 식이다. 배송을 받은 뒤 소유할지 결정하는 ‘선 주문, 후 결정’ 방식의 소비다.

이 과정에서 태그도 제거되지 않은 채 곧바로 버리거나 집 한구석에서 먼지가 쌓여가는 물품이 생긴다. 경향신문은 이런 소비와 폐기 형태를 ‘딜리버-스루’(Deliver-through·배송 즉시 버림), 이를 통해 발생하는 쓰레기를 ‘패스트래시’(Fast+trash·실시간으로 생기는 쓰레기)라는 새로운 용어로 규정하기로 했다.

“버릴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
지난 8월 22일 경기 파주시 한 중고의류 수출업체 창고에 소비자가 폐기한 뒤 수거된 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한 주에 20t 분량은 소각된다. 정지윤 선임기자

A씨가 타오바오 주문을 시작한 건 지난 1월이다. 1만원 이하 상품이 많고 알리·테무보다도 저렴하다는 말에 직구를 시도했는데 “신세계가 열린 기분”이었다고 했다. 육아휴직 기간 아기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며 온라인 쇼핑이 잦아졌다. 아기에게 필요한 물건도 많은 시기였다.

그가 1~8월 타오바오를 통해 구매한 물품을 전수분석한 결과 의류·액세서리·가방 146건(동일물품 복수 주문은 별도 건수로 집계)을 포함해 163건의 소비가 이뤄졌다. 이 플랫폼을 이용하기 전보다 폭발적으로 소비 건수가 늘었다. 이 중 100건(61.35%)은 현재 소유하고 있지만, 63건(38.65%)의 주문 물품은 폐기했다.

동일물품 중복 소비와 ‘딜리버-스루’식 폐기가 적지 않았다. 옷과 양말, 머리핀 등을 다른 색상으로 여러 개 주문한 경우는 35번이다. 아기 옷 고르는 법이 익숙하지 않아 여러 개를 사보기도 했고, 어울리는 색이 고민될 때는 모두 주문하다보니 대량주문이 익숙해졌다. “최근 양말을 주문했을 때는 너무 많이 배송이 오니까 양말 공장 사장이 된 것 같았다”고 했다.

폐기된 63건 중 상당수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주문할 때부터 다 사용할 거란 생각은 없어요. ‘꽝도 있겠지’ 하고 그런 건 버릴 생각으로 사죠. 한 벌에 몇 천원 뭐 이러니까…절반 건지면 많이 건지는 거예요.”

‘테스트용’ 소비는 A씨만의 얘기가 아니다. 취업준비생인 B씨(24)는 종종 중국계 이커머스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저가의 옷과 액세서리, 화장품을 대량 구매한 뒤 쓸 것을 골라낸다. 이른바 ‘알리깡’ ‘테무깡’으로 불리는 소비다. 1만9000원에 10개 물품을 담은 적도 있다. ‘취준생’이 이용하기에도 부담이 없는 가격이었다. 종종 반품 대신 폐기를 택한다. “아무 생각 없이 버려요. 워낙 싸고, 그냥 한 번 테스트해본다는 생각으로 산 것이니까요. 스트레스를 푸는 용이기도 하고요.”

테무 이용 경험이 있는 김정진씨(57)는 “반품 과정도 불편하고 5000원짜리 반바지 두 장이니까 그냥 ‘먹고 떨어져라’하고 버렸다”면서 “가격상 시간을 쓰기 귀찮으니까 ‘버리고 말지’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버리는 이유는 다양하다. 사이즈가 안 맞아서, 안 어울려서, 한 철이 지나서, 제품 설명과 너무 달라서, 파손된 채 배송돼서, 기대한 것보다 저품질이어서 즉각 폐기 대상이 된다. 저가의 저품질 상품은 무료나눔이나 중고판매로 내놓기도 어렵다. “사실상 새 옷이니까 누군가 입게 되겠지. 어딘가 쓰임이 있겠지”(A씨)라는 생각으로 헌 옷 수거함에 넣는 일도 있다. 한 온라인 비대면 수거업체 관계자는 “(수거하다보면) 태그 달린 옷도 들어온다”고 말했다.

무엇이 ‘딜리버-스루’를 키우나

‘패스트래쉬’를 양산하는 소비와 폐기는 소비자들만의 책임일까. 전문가들은 생산업계와 온라인 플랫폼의 마케팅 전략, 미디어의 책임을 언급했다. 사단법인 ‘다시입다연구소’에 의류폐기물 관련 입법운동을 자문하는 김보미 변호사는 “전반적으로 옷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버려지는지는 감춰지고 오로지 ‘싸다’는 것만 강조되고 있다”면서 “사람들은 옷 재질을 플라스틱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마케팅과 생산자는 대량 소비를 부추긴다”고 말했다.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이런 구조가 된다. 석유를 기반으로 하는 플라스틱 합성섬유가 생산 단계 초반부터 환경오염을 불러온다. 노동착취와 저품질 대량생산 방식이 더해지며 초저가 상품이 만들어진다. ‘억만장자처럼 쇼핑하기’ ‘한 철 입기 좋은 ○○’ 등을 내세우는 플랫폼의 마케팅 전략,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을 활용한 맞춤형 광고와 프로모션이 대량 소비를 유도한다. 인플루언서들은 ‘알리깡’ ‘테무깡’ 도전·실패기를 콘텐츠화하면서 이런 소비를 일종의 ‘흐름’으로 인식하게 한다. 일부 의류업계와 플랫폼 업계는 인공지능(AI) 등을 통해 재고를 줄이는 전략을 가동한다지만 대량 소비를 부추기는 마케팅의 힘이 더 세다.

‘알리깡’이 취미인 B씨는 “심심풀이로 장바구니에 이것저것 담아놓곤 하는데 하나씩 물건이 쌓일 때마다 ‘N개만 더 담으면 무료배송’이라는 문구가 나온다”며 “배송비를 줄이려고 쓸데없는 것까지 사게 될 때가 많다”고 말했다. 대학생 최다인씨(22)는 자주 이용하는 온라인 쇼핑몰 ‘에이블리’에 ‘신학기 세일’ 광고가 나올 때 지나치기 어렵다고 했다. 최씨는 “평소에는 관심도 없었을 옷까지 휩쓸리듯 사게 된다”면서 “한 번 옷 광고를 보면 비슷한 광고가 다른 애플리케이션에도 뜨는데, 할인 문구까지 나오면 필요 없는 물건도 ‘사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소비자 차원의 변화만으로는 유의미한 변화를 끌어내기 어려운 환경이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전과정평가팀장인 최요한 박사는 “플랫폼 가격경쟁이 심화하고 알고리즘 활용 광고가 등장하면서 산업 전반이 불필요한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며 “소비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소비자의 행동 변화만으로 환경 부담을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과잉 생산·소비 조장, 의류 뿐 아냐
경향신문 창간 기획 연계 전시 ‘쓰레기 오비추어리’전의 한 작품. 대형 연예기획사가 주관한 ‘영상통화 팬싸인회’에 응모하려고 한 팬이 사들인 80장의 CD 앨범을 쌓아 올렸다. 2021년 발매된 CD는 한 번도 재생되지 않은 채 폐기 대상이 됐다. 정지윤 선임기자

대량 구매를 유도하는 마케팅은 산업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대형 엔터테인먼트사들의 ‘앨범깡’(랜덤 포토카드 확보나 행사 응모용으로 다량의 음반을 사서 버리는 것) 유도 전략은 노골적인 사례다. 이는 실물 앨범을 많이 살수록 아이돌 멤버와 소통하는 행사 응모권에 당첨될 확률이 높아지도록 하는 방식이다. 코로나 때 ‘영상통화 팬사인회’ 등이 활성화하면서 앨범 구매량이 더 늘었다. 팬덤 마케팅의 병폐로 종종 지적되지만 변화 속도는 더디다.

이렇게 구매한 앨범은 응모 뒤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구석에 머물거나, 폐기되는 경우가 많다. 당첨이 안되면 “그냥 쓰레기만 얻”는 셈이다. 한 아이돌 그룹 팬인 최씨도 응모를 위해 최대 200장의 CD앨범을 구매해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200장을 샀는데 (당첨) 컷이 230장이어서 못 갔어요. CD 플레이어도 없으니까 들어본 건 하나도 없고, 이사갈 때 버릴 것 같아요.”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3월 발표한 ‘팬덤 마케팅 소비자문제 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팬덤 활동 경력이 있는 조사대상 500명 중 ‘CD’를 이용하는 이는 5.7%에 불과했다. 과도한 양의 음반 구매가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한 비율은 67.8%였다.

유사한 경험이 있는 대학생 김모씨(21)도 ‘응모용’으로 산 앨범들 일부는 주변과 나누거나 팔았지만 일부는 “장당 50원 주고도 안 팔릴 것 같아” 버렸다. 그는 “앨범 자체의 소장 가치는 없고 응모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며 “앨범 구성에서 쓰레기가 잘 나오게 규제를 강화한다거나 제작 방식을 바꾸는 게 맞다”고 말했다.

핵심은 과잉생산 제어

문제 핵심은 공산품의 과잉생산으로 모아진다. 보관 공간 부족, 브랜드 가치 하락 방지 등을 명분으로 이뤄지는 의류업계의 재고 소각 역시 과잉생산 시대의 그늘이다. 유럽 환경청에 따르면 2020년 전체 섬유 폐기물 중 18%가 제조된 후 판매되지 못한 재고품이다. 유럽에서 출시되는 모든 의류 제품 중 4~9%가 소비자의 손에 닿기도 전에 폐기된다. 최 박사는 “의류 생산 업체와 브랜드사는 결코 소비자의 수요에 맞는 양만 생산하지 않는다”며 “한국 역시 전국에 있는 아울렛에 재고가 계속해서 쌓이는 것만 봐도 생산량 자체가 과도하게 많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패션에디터로 일하는 김태훈씨는 “패션 산업이 환경에 악영향을 주는 가장 큰 부분은 과잉생산”이라며 “생산 과정 자체도 중요하지만 인공지능(AI) 기반 재고관리 등 예리한 소비 예측으로 팔지 못하고 버리거나 소각하는 재고량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창간 기획 연계 전시 ‘쓰레기 오비추어리’전의 한 작품. 폐기된 뒤 중고의류 수출업체를 거쳐 해외로 갈 옷더미(베일)가 전시장에 놓여있다. 일부 옷들은 소비 즉시 태그 제거도 되지 않은채 버려진다. 정지윤 선임기자

■연관기사


☞ [쓰레기 오비추어리②] 색상별로 샀다가 버린 옷…탄소발자국 얼마나 남겼을까?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410100600011


☞ [창간기획] 나이지리아로 간 ‘7번’ 유니폼, 옷의 죽음을 따라가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410070600111


☞ [창간기획]‘쓰레기 오비추어리’…짧게 살고 오래 죽는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410070600101

■관련 전시(10월 7~12일)

경향신문 창간 78주년을 맞아 게재하는 동명의 기획 시리즈와 연계한 전시가 오는 12일까지 지구와사람 갤러리홀(서울 용산구 회나무로 66)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버려진 물건들의 생애사를 조명하며 기후위기 문제를 심각성을 알린다. 한 사람의 궤적이 담기는 오비추어리(부고 기사)와 같이 버려진 옷과 신발, 구두의 처음과 끝을 따라가는 작품들이 담겼다. 무료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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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인터랙티브

☞ 쓰레기 오비추어리
     https://www.khan.co.kr/kh_storytelling/2024/trashObituary/

■인터렉티브

인터랙티브 ‘나 의(衣) 생’

☞ 나 의(衣) 생
     https://www.khan.co.kr/kh_storytelling/2024/trashObituary/trashClothes/index.html

창간기획팀
유정인(정치부) 고희진(전국사회부) 이홍근(정책사회부) 최혜린(국제부) 정지윤·한수빈(사진부) 박채움(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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