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물리학상 이어 화학상… AI가 과학혁명 주도하는 시대로
베이커 美워싱턴대 교수 수상
AI 활용 단백질 구조 예측·설계
물리학상은 ‘머신러닝’ 연구진
인류 과학 문명에 획을 긋는 성과를 시상하는 ‘노벨 과학상’을 인공지능(AI)이 휩쓸었다. AI의 대부로 불리며 기술의 토대를 놓은 연구자들이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데 이어, ‘알파고 쇼크’로 세계를 놀라게 한 AI 개발자들이 화학상까지 거머쥔 것이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9일(현지 시각) 구글 딥마인드의 최고경영자 데미스 허사비스(48)와 연구원인 존 점퍼(39) 박사, 그리고 미국 워싱턴대의 데이비드 베이커(62) 교수를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베이커 교수는 단백질 설계 분야의 선구자로 새로운 단백질을 만들 수 있는 AI인 ‘로제타폴드(RoseTTAFold)’를 개발했다. 허사비스 CEO와 점퍼 박사는 또 다른 단백질 구조 예측·설계 AI ‘알파폴드’를 개발했다. 노벨위원회는 “50년도 넘은 단백질 구조 예측의 꿈을 실현했다”며 “단백질 구조 예측과 설계는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이라고 밝혔다. 이들이 개발한 AI는 기존 방법으로는 수백 년이 걸릴 단백질 구조 예측을 대폭 단축해 신약 개발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노벨 과학상은 인류의 과학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수상 기준으로 삼아온 노벨위원회가 과학에서 AI의 역할을 공인했다는 의미다. 석차옥 서울대 화학부 교수는 “기초과학의 틀을 깨는, 패러다임을 바꾸는 AI의 파급 효과가 앞으로 수십 년간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AI 관련 연구자들이 올해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잇따라 수상한 것에 대해 과학계 일각에서는 “사실상 AI가 과학을 주도하는 시대가 왔다는 의미”라고 평가한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은 AI의 알고리즘을 개발했고, 화학상 수상자들은 이를 활용해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고 설계한 인물들이다.
특히 나온 지 6년밖에 되지 않은 단백질 구조 예측 및 설계 AI ‘알파폴드’가 노벨 화학상 수상 성과로 인정받은 것에 놀라는 분위기다. 전날 물리학상을 수상한 존 홉필드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의 연구 성과가 30~40년 전의 것인 데 비하면, 2018년에 첫선을 보인 알파폴드의 수상은 파격이라는 것이다. 백민경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그동안 노벨상은 실제 연구가 이루어진 시점에서 최소 10~20년이 지난 뒤에야 성과를 인정받아 수상자로 결정됐는데, 이번에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AI 연구 성과가 수상해 놀랐다”고 말했다. AI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학계 평가가 명확하게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노벨위원회가 AI의 파급력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과학의 혁신 이뤄낸 AI
노벨위원회도 “AI의 머신 러닝이 현재 과학, 공학, 일상생활에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밝히며 AI가 끼치고 있는 과학적 영향력을 높이 평가했다. 거의 모든 물리학의 모델링과 분석을 위한 도구로 AI가 쓰이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의 기초가 되는 단백질을 설계하는 데까지 AI가 필수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노벨위원회는 “노벨 화학상 수상자 덕분에 인류가 새로운 단백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가 됐다”고 했다. 신소재 등 물질 개발과, 생명의 구성 요소 설계를 아우르는 생화학까지 자연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가 AI를 통해 ‘퀀텀 점프(비약적 도약)’를 이뤄낼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는 배경이다. 과학계에서는 “노벨 물리학상은 AI의 대부가 수상했고, 화학상은 사실상 AI가 받은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AI는 과학계의 연구 방식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
로제타폴드와 알파폴드를 필두로 한 단백질 구조 예측·설계 AI는 단백질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기본 도구가 됐다. 단백질은 대부분의 생명 현상을 매개하는 중요한 분자로, 다양한 의약품 개발뿐 아니라 신소재 개발에도 활용된다.
의료 진단에서도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수천만 장의 엑스레이, CT(컴퓨터단층촬영), MRI(자기공명영상) 자료를 학습한 AI가 의사보다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루닛, 뷰노, 딥바이오 등 국내 AI 진단 스타트업들도 암, 알츠하이머, 심혈관 질환 등 다양한 질환을 진단해 낼 수 있는 AI를 상용화했다.
기상학 분야에서 AI는 기후 변화로 속출하고 있는 기상 이변을 예측할 때 수퍼컴퓨터보다도 나은 성능을 보이고 있다. 기존 데이터를 모두 계산해야 하는 수퍼컴퓨터와 달리 AI는 적은 양의 과거 데이터에서 연관성을 파악하고 추론을 통해 미래 기상을 예측한다. 구글 딥마인드의 날씨 예측 AI ‘그래프캐스트’는 수퍼컴퓨터가 3시간에 걸쳐 계산하는 시나리오를 1분 만에 만든다.
◇연구 전반 이끄는 ‘AI 과학자’도 등장
앞으로는 실제로 AI가 노벨상을 수상해도 당연하게 여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가설 설정에서 논문 작성까지 과학 연구의 전 과정을 진행하는 AI가 속속 개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스타트업 사카나 AI는 최근 과학 연구를 스스로 하는 ‘AI 과학자’를 공개했다. 이 AI는 연구자가 논문의 방향만 제시하면 알아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실험 수행과 논문 작성까지 진행한다. 미국 카네기멜런대 화학공학과 게이브 고메스 교수팀도 이와 비슷한 ‘AI 화학자’를 개발했다. 이 AI는 방대한 논문과 참고 자료를 학습한 후 실험 과정을 설계하고 적합한 시약과 실험도구를 선정한다. 이후 로봇에 명령을 내려 화학 촉매 반응을 일으키는 실험까지 할 수 있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지난 8월 칼럼을 통해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패턴을 감지하며, 연구에 투입되는 자원을 최적화하고, 가설도 생성할 수 있다”며 “이런 능력은 기후변화나 식량 안보, 질병 등 전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AI는 모든 과학 분야에서 혁신적인 발전을 촉진하고 있다”고 평했다.
☞인공신경망과 딥러닝
인공신경망은 인간의 뇌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인공지능 학습 알고리즘이다. 인간이 생각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다단계 추론을 통해 학습하고 결과를 낸다. 인공신경망을 활용해 음성·사진 등 비정형 데이터를 분석해 낼 수 있는 AI 학습 방식이 ‘딥 러닝’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