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북한을 ‘핵 보유국’ 만든 제네바 합의 30주년
망신당하고도 韓 핵무장은 반대
우리의 운명, 가까운 동맹국에도
맡기면 안 된다는 교훈 얻어야
1994년 10월 21일 북한의 핵 개발 중단 대가로 경수로를 제공하는 미·북 제네바 합의가 맺어진 후의 일이다. 주미 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외교관 L씨가 그해 12월 취임한 공로명 장관 보좌관으로 일하게 됐다. 하루는 L씨가 공 장관의 관용차 안에서 제네바 합의 문제를 꺼냈다. 그러자 공 장관이 “제네바 합의에 관여한 사람들은 모두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판했다.
L씨가 청와대로 유종하 외교안보수석을 찾아갔을 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나중에 공 장관 후임이 된 유 수석은 외교부에서 제네바 합의에 관여했던 이들을 지칭하며 “윗사람에게 아부만 하고 국익은 안중에도 없던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외교부 고위직을 지낸 L씨는 2021년 출간된 공 장관의 구순(九旬) 기념 문집 ‘공로명과 나’에 이런 발언을 모두 기록해 놓았다. “공 장관은 실제로 외교부 인사 때마다 제네바 합의 관련자들을 철저히 소외 시켰다”는 문구가 눈에 띈다.
공로명·유종하 장관은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지키지 않아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미국이 북핵 위기를 봉합하기 위해 ‘(핵) 동결 대 (정치적·경제적) 보상’ 방식을 적용, 매년 50만t의 중유를 주는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달 체결 30주년을 맞는 제네바 합의는 공·유 두 장관의 우려대로 흘러갔다. 핵무기 개발은 크게 핵연료 재처리에 의한 플루토늄과 우라늄 농축으로 나눠진다. 북한은 이 합의가 플루토늄을 이용하는 영변 핵 시설에 집중돼 있는 것을 악용,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 개발에 나섰다. 미국은 합의 당시부터 북한의 우라늄 농축을 의심했으나, 2002년까지는 이를 본격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다. ‘대화로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미국의 오판(誤判)은 북한에 시간을 벌어주며 최근 북한이 ’핵 보유국’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줬다.
1994년 합의 당시 핵무기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던 북한은 30년 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사실상의 핵무기 보유국’이라고 말할 정도가 됐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990년대 초까지 미국의 전술 핵무기가 수백 기 배치됐던 한국에서는 핵 전력이 모두 철수, ‘공포의 균형’을 맞출 수 없게 됐다. 북한은 제네바 합의 때 ‘조선반도 비핵화’를 내걸었는데, 북한 비핵화 대신 남한 비핵화를 초래한 것이다. 올해 국군의 날 시가행진 후 북한의 김여정이 “핵 보유국 앞에서 졸망스러운 처사”라고 한 것은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리라. 제네바 합의는 2002년 부시 행정부가 고농축 우라늄 문제를 제기, 파기됐으나 ‘동결 대 보상’ 프레임은 북핵 6자 회담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제네바 합의를 만들어낸 미국의 로버트 갈루치 대사는 참회록을 써도 시원찮은데 반성하는 기색이 별로 없다. 그는 지난 5월 제주 포럼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이미 가진 핵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은 없지만 더 이상의 핵무기는 개발하지 않는 데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궤변을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전술핵을 재배치하는 것은 ‘나쁜 생각’이라고 반대하고 한국의 핵무장 방안에는 날카롭게 반응한다. 과연 제네바 합의가 미국의 핵심 이익을 다루는 문제였다면, 그렇게 허술하게 처리해 망신당하고도 이렇게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미국 행정부에서 한반도 핵 문제를 다뤄온 인사들이 갈루치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제네바 합의라는 거대한 사기극 30주년을 맞아 우리는 뒤늦게라도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가장 큰 교훈은 최근 사기 집단의 본색을 분명히 드러낸 김정은 체제에 대한 신뢰 문제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교훈은 아무리 가까운 동맹국일지라도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핵 관련 결정을 타국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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