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동학- 철학실종시대, 사라진 강원 동학사를 찾아서] 17. 동학혁명 그후, 3·1운동의 토대가 된 천도교

김진형 2024. 10. 1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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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 만세” 그날의 함성되어 빼앗긴 조국 밝힌 동학정신
손병희 동학→천도교 명칭 개칭
교도 300만명 이상 종교로 성장
1919년 3·1운동 주축세력 활약
일제 항거 자주독립 의지 천명
동학 ‘비폭력 저항’ 가치 계승
천도교인 도내 만세운동 주도
국내 최초 근대 종합잡지 발간
항일정신 확산·근대사상 보급
조선인 사회의식 변화 큰 역할
▲ 3·1운동이 벌어졌던 탑골공원

서울 도심을 걷다 보면 3·1독립운동의 유적지가 곳곳에 보인다. 민중들의 만세 함성이 터진 탑골공원(옛 파고다 공원)부터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 터, 독립선언문을 인쇄한 보성사 터가 대표적이다. 모두 동학의 정신을 계승한 천도교와 관련된 장소다.

1894년 일본의 침략을 막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어났던 동학군의 혁명은 무수한 피를 흘린 채 좌절됐다. 살아남은 동학군과 가족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어떤 이들은 고향을 떠나 화전민이 됐고, 의병에 가담한 이들도 많았다.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동학군이 흘린 피는 헛되지 않았다. 동학의 맥을 이은 천도교는 전국적인 조직망과 자금, 투철한 정신으로 3·1운동의 지도부가 됐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중 15명이 천도교인이었고, 이중 이종훈·홍병기 등 9명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이들이다. 한시준 전 독립기념관장은 최근 춘천에서 열린 강연에서 “천도교는 개신교, 불교계와 연합해 3·1 독립선언을 조직적으로 일으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번 취재에서는 서울에 있는 독립만세운동 유적을 방문,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의 연관성을 살핀다.

▲ 독립운동 기금 마련을 위해 지어진 천도교 중앙대교당. 1918년에 시공돼 1921년 완공됐으며 명동성당, 조선총독부와 더불어 서울 시내 3대 건물로 꼽혔다

■ 의암 손병희와 천도교 시대의 개막

해월 최시형에게 도통을 이어받은 동학의 3대 교조 의암 손병희의 삶은 외롭고 처절했다. 많은 동학군 지도자가 처형된 상황에서 피신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죽고 싶어도 살아남아 동학의 불씨를 되살려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가 4년간 체류한다. 반면 손병희와 함께 3인 지도체제를 이끌던 송암 손천민과 구암 김연국은 해월을 따라 죽어야 한다는 ‘순사’를 주장했다. 손천민은 정부의 지목을 피하지 않아 교수형을 당했고, 인제 출신 김연국도 향례를 거행하던 중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904년 풀려난다.

일본의 신문물과 민도에 충격을 받아 민중개화의 입장으로 노선이 바뀐 손병희는 1905년 천도교로 명칭을 개칭한다. 손병희와 함께 일본에 체류했던 이용구가 친일파로 변절, 진보회를 결성한 뒤 송병준의 일진회와 통합하는 등 동학 교단의 내분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조직을 개편한 천도교는 1919년 300만명 이상의 교도를 가진 한반도 최대의 종교로 성장한다. 1912년 서울 우이동에 봉황각을 세우고 천도교 지도자 483명을 양성해 전국 조직망을 가동한다. 1918년에는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축사업을 전개, 성금 100만 원 중 청사 건축에 쓴 27만 원을 제외한 대부분은 3·1 독립운동과 독립군 자금으로 사용했다.

▲ 태화관 터에 있는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 동학 정신 3·1운동으로

마침내 1919년 고종의 장례식 예행연습이 예정됐던 3월 1일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읽고 ‘독립 만세’를 외친다. 개신교에서는 이승훈 등 10명, 불교계에서는 만해 한용운 등 2명이 참여해 종교계를 아우르기도 했다.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는 독립선언서 3만 5000장이 극비리에 인쇄해 교단 내부와 학생들에게 배포한다. 이와 함께 ‘조선독립신문’을 발간해 만세 시위 상황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문서, 임시정부 조직 계획 등을 보도했다.

3·1운동은 통합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고, 자주적 독립 의지를 천명한 결정체였다.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 원칙은 세계 언론에서도 주목할 만했고, 일본 육군 중심의 강압적인 무단정치가 문화정치로 변환되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정성헌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은 “천도교가 미리 조직을 키워놨기 때문에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장기간 펼쳐질 수 있었다. 이들은 만주에 마을 공동체를 설립해 독립군 물자공급의 역할도 담당했다”고 말했다.

당시 만세운동 참여자는 205만명, 희생자는 7700명 이상으로 알려졌다.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손병희는 재판 과정에서 당한 고문으로 중병을 얻어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1922년 5월 19일 61세로 세상을 떠난다.

종로구 수송공원에 있는 보성사 터 비석을 취재진이 찾았을 때, 한 외국인 관광객이 비석을 촬영하며 스마트폰으로 내용을 번역해 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보성사 터가 어떤 곳인지 취재진이 설명해 주자 이 관광객은 “일본 통치 아래 벌어진 일이라면 희생을 각오했을텐데 의지가 대단하다. 인상깊은 역사”라고 했다. 반면 일반 시민들의 발길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 태화관 터에 있는 삼일독립선언유적지 비석

■ 민중의 의식 깨운 잡지 ‘개벽’

3·1운동 이후에도 천도교의 활동은 조선인의 의식을 크게 변화시킨다. 춘천 출신 언론인 차상찬을 비롯해 이돈화·김기전·박달성 등이 참여했던 국내 최초의 근대 종합 잡지 ‘개벽’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찾았던 매개였다. 천도교청년회 주도로 개벽사를 설립, 일제에 대한 항쟁을 기본 노선으로 삼았기에 문화적 파급력이 컸다. 개벽은 1920년 창간호부터 1926년 폐간까지 발매 금지 34회 등 모진 수모를 겪었지만 폐간 후에도 별건곤, 혜성, 제일선, 어린이, 학생, 농민 등의 잡지를 꾸준히 펴냈다. 개인의 자각과 국가의식의 발견이라는 양대 축을 중심으로 어린이, 여성 인권 향상에 힘쓰는 등 근대 사상의 문을 여는 선도적 역할을 했으며, 김소월 등 유명 문학인도 배출했다. 손병희의 사위이자 아동문학가인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었고 차상찬과 함께 어린이날 제정에 참여한다. 최시형의 외손자 정순철은 1924년 ‘까치야’ 등 11곡을 발표, 한국 동요의 초석을 놓았다. ‘짝짜꿍’, ‘졸업식 노래’ 등이 그의 곡이며 당시 음악가로서는 드물게 친일 논란도 없다. “아이를 때리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던 해월 최시형의 정신이 아동인권 운동으로도 계승됐음을 알 수 있다.

▲ 보성사 터를 보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

■ 강원 천도교인들의 활동

강원도의 주요 만세운동 현장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천도교인들이 주도했다. 홍천 풍암리 자작고개 전투에 참여한 김덕원은 홍천 동학군의 기포지인 물걸리 동창마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홍천에서 도피중이던 해월 최시형을 보살폈던 접주 오창섭도 홍천읍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춘천에서는 윤도순이 대표적이다. 충북 보은 집회에 참여했던 그는 우금치와 홍천 자작고개 전투까지 참가했다 돌아온 입지 전적의 인물이다. 천도교 춘천군교구 설립위원으로 활동했고, 이준용·박순교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천도교 춘천교구장으로 활동했던 허기훈은 신도들에게 특별성미금을 수합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납부하는 활동을 펼쳤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 앞에 있는 독립선언문 배부터

양구 한전리 이중항은 1880년 인제에서 최시형이 동경대전을 간행할 때 입도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충북 청주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1907년 정미의병에 참모로 참여했다. 천도교 양구교구장을 역임한 그는 1919년 양구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성주현 청암대 교수는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데 있어 천도교 등 종교계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임형진 동학학회장은 “3·1운동을 비롯해 한국 사회 변화의 기점마다 동학이 바탕이 된 비폭력 저항의 전통이 이어져 왔다”고 말했다. 김진형

▲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그린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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