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뇌물 받은 이가 큰소리 떵떵 치는 세상

이남석 발행인 2024. 10. 9.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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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85
순천왜성에 공세 퍼부은 순신
왜성 공격하지 않은 유정 장군
유정에게 따지러 간 진린 제독
일본으로부터 뇌물 받은 유정
뇌물 받고 서로군 퇴각 결정해

명나라 장수 유정. 왜적을 물리쳐야 할 임무를 띠고 조선에 온 그는 어찌 된 일인지 소극적으로 임했다. 어떤 전투에선 슬그머니 내빼기도 했다. 왜적을 무서워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작든 크든 뇌물을 받은 이들에게 권한이나 책임을 부여해선 안 되는 이유다. 그런데도 이 나라엔 뇌물을 받고도 되레 큰소리를 치는 사람들이 숱하다. 전형적인 도덕적 해이다.

이순신은 순천왜성을 향해 끊임없이 공세를 퍼부었다. 무술년 9월 22일에도 아침부터 함대를 몰아 적진에 들락날락하면서 싸웠다. 조수 때는 성의 북쪽 수로를 타고 들어가 소서행장의 부대와 싸우다 조수가 빠지면 물러 나왔다. 이렇게 장도에 있는 적의 군량미 창고를 다 불태워버렸다. 또 적 함선 30척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했다. 왜군 사상자는 1000여명이 넘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의 유격장군 복일승이 왼쪽 팔뚝에 총을 맞았고, 군사 11명이 적 탄환에 전사했다. 조선 수군의 지세포만호와 옥포만호가 총을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유정은 23일부터 25일까지 왜성을 공격하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오른 진린 제독이 유정에게 따지러 갔다.

하지만 '공성 기구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유정의 핑계가 적힌 서신만 이순신에게 들고 왔다. 27일부터 북서풍이 세게 몰아치면서 29일까지 수로군은 함대를 움직이지 못했다. 30일 저녁, 명나라 수군의 유격 왕원주, 유격 복승, 파총 이천상 등이 강화도 이북을 수비하던 100여척의 함선을 이끌고 수로군에 합류했다.

대규모의 명나라 수군 함대가 합류하자 자신감을 얻은 진린이 10월 1일 새벽에 유정 제독과 만나 모종의 합의를 하고 돌아왔다. 다시 왜성을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2일에는 조선 수군이 단독으로 새벽 6시부터 정오까지 적을 공격해 많은 적을 죽였다. 이때 사도 첨사 황세득과 이청일이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제포만호 주의수, 사량만호 김성옥, 해남현감 유형, 진도군수 선의문, 강진현감 송상보가 적의 총에 맞았으나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10월 3일, 유정은 진린과의 약속대로 왜성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그저 사다리 부대를 앞세워 함성만 지르며 공격하는 시늉만 냈다. 서로군의 무성의한 태도와는 달리 수로군은 적극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진린 함대와 이순신 함대는 초저녁부터 수로를 타고 왜성으로 들어가 자정에 이르도록 적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다 진린 함대가 곤경에 빠졌다. 조수가 빠지면서 많은 병선들이 갯바닥 위에 얹혔던 거다.

기회를 포착한 왜군은 갯바닥으로 들어가 명나라 수군 800여명을 거침없이 죽였다. 명나라 사선沙船 19척과 호선號船 20여 척도 불에 타버렸다. 진린 도독 등이 타고 있던 판옥선 3척에도 왜병들이 올라타면서 위기에 빠져 있었다.

진린은 역시 명성대로 절륜한 맹장이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수없이 엎어지고 자빠지면서도 왜병들을 베어냈다. 마침내 밀물이 차오르자 이순신 함대의 판옥선들이 달려들어 진린과 판옥선 3척을 구출해냈다. 이 과정에서 안골포 만호 우수禹壽가 적의 탄환에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유정의 육군은 진린과의 당초 약속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았다. 게다가 위기에 빠졌던 진린을 구하러 오지도 않았다.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는 수모를 당한 진린 도독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다시 병선을 이끌고 소서행장의 군사와 싸웠다. 하지만 유정의 육군은 이번에도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진린 제독은 다음날인 0월 4일, 육지에 상륙해 유정의 진으로 들어갔다. 유정의 '수자기帥字旗'를 떼어내 찢어버리며 이렇게 말했다. "육군이 이 모양이니 어찌 패하지 않겠나! 수군은 힘을 다해 싸우는데 보고만 있단 말인가? 참으로 고약한 사람이로군!" 유정은 얼굴이 흙빛같이 변하며 답했다. "나는 수하에 장수다운 사람이 없으니 낸들 혼자 어찌하겠소." 이날도 수로군은 아침부터 시작해 하루 종일 적을 공격했다. 적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 달아나기에 바빴다.

이런 상황인데도 유정은 서로군의 퇴각을 결정했다. 동일원이 이끄는 중로군이 사천왜성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자신한테 몰려올까 봐 잔뜩 겁을 먹은 것이다. 다음날, 순천의 바다에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 수로군 함대는 함선들이 서로 부딪히는 상황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하루를 다 보내다시피 했다.

이때 유정은 슬그머니 군사를 몰고 순천의 부유창으로 퇴각했다. 수천석의 군량과 병기도 버리고 물러갔다. 이 때문에 군량 부족으로 허덕이던 소서행장의 군사는 한숨을 돌렸다. 이순신 함대가 적의 군량을 모두 태워버렸던 터라 소서행장은 그동안 약탈한 금은보화를 비밀리에 유정에게 보내 사정사정을 했던 것이다. 유정이 일부러 군량을 버리고 부유현으로 퇴각한 까닭이다.

10월 6일, 도원수 권율이 이순신에게 군관을 보내 서신을 전했다. "유정과 소서행장의 사신이 서로 왕래하고 있다. 부유현에서도 도망가려 한다." 이순신은 이날 일기에 "통분痛憤 통분痛憤,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썼다.

이순신과 진린의 수로군은 고금도 본영으로 돌아왔다. 군량미와 무기를 채우고 다시 왜성을 치러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보름간 순천왜성을 공격한 장졸들에게 휴식도 제공해야 했고, 전사한 장졸들의 장례도 치러야 했다.

이때 명 육군제독 유정은 부유에서 또다시 순천으로 퇴각했다. 소서행장으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은 터라 싸울 의사가 있을 리 없었다. 뇌물 중에는 일본 미녀 1명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소서행장은 유정의 군사를 뇌물을 이용해 물러나게 만들었지만 본국으로 돌아갈 걱정에 가득 차 있었다. 풍신수길은 죽기 전에 5대로大老, 3중로中老, 5봉행奉行을 정해 어린 군주 풍신수뢰를 보좌하게 했다. 5대로의 인물은 덕천가강, 전전리가, 모리휘원, 부전수가, 상삼경승 등이다.

3중로는 생구친정, 중촌일씨, 굴미길청 등으로, 5봉행으로는 천야장정, 증전장성, 석전삼성, 장속정가, 전전현이 등으로 구성됐다. 5대로 3중로의 무리는 '철병하라'는 풍신수길의 유언을 전달하기 위해 덕영수창德永壽昌, 궁본풍성宮本豊盛 두 사람을 조선으로 보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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