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신조어 판쳐도 한국어는 여전히 건강…자학하지 말지어다[한성우의 말과 글의 풍경]

기자 2024. 10. 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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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한글과 한국어, 문자와 언어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세종대왕은 당신이 만든 한글과 그것으로 적을 한국어에 대해 자학적인 태도가 아닌 긍정과 응원의 태도로 바라보고 계실 것이다. 서성일 선임기자 centing@kyunghyang.com
문자는 한글·언어는 한국어로 구별, 오롯이 ‘문자의 날’로 기념
바르고 고운 ‘순수의 기준’ 아닌 너와 나 우리 ‘소통의 차원’으로
‘세계 최고의 문자’ 한글로 적는 한국어에 대한 자부심을 다지길

한글날, 한글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날이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특별한 날이니 모두의 축복 속에 기쁨으로 보내야 하는 날이다. 당연히 생일에 대한 축하와 그 아버지에 대한 칭송이 넘쳐난다. 세계 최고의 문자와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이자 성군에 대한 자부심도 넘쳐난다. 그런데 ‘문자’를 ‘언어’로 착각하는 이들 때문에 생일잔치의 풍경이 묘하게 바뀐다. 세계 최고의 문자 한글은 외래어, 외국어, 외계어, 신조어에 의해 핍박을 받는 존재가 된다.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고이 잠들어계신 세종대왕은 순수하지 않은 우리말, 바르고 곱지 않은 우리말의 현실 때문에 졸지에 ‘지하에서 통곡’하는 존재가 된다. 모두가 기뻐해야 할 생일에 축하와 자학이 공존하며 주인공이 통곡하는 풍경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문자와 언어의 혼란

“우수한 한글 놔두고… 외국어 남발하는 교육기관, 사라지는 한글”. 한글날이 되면 이런 제목을 단 기사들을 수없이 보게 된다. 한글날은 한글의 생일이고 ‘한글’은 문자이니 이날은 문자의 날이다. 한글은 한국어를 적기 위한, 그리고 한국어를 적는 데만 쓰이고 있지만 언어를 가리키는 ‘한국어’와는 엄연히 다르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도 한국어가 있었고 지금까지도 한국어는 오롯이 살아 있다. 심지어 한글이 창제되지 않았을지라도 한민족이 중심이 된 나라가 지금까지 존재한다면 한국어는 이 땅에서 여전히 쓰이고 있을 것이다. 문자보다 언어가 먼저였고 문자가 없어도 언어는 존재하며 한글이 아니어도 어떤 문자로든 한국어를 적을 수 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착각하고 있지만 한글날은 당연히 문자의 날이지 언어의 날이 결코 아니다.

문자와 언어를 혼동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한 사례이지만 특정한 문자가 한 언어만 적는 데 사용될 경우 더 심하다. 우연히도 한·중·일 삼국은 각각 한글, 한자, 가나라는 고유한 문자를 가지고 있고 각각의 문자를 원칙적으로는 자신의 언어를 적는 데만 쓴다. 따라서 각 문자를 보면 그것이 곧 그 언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적인 이유로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더 크게 혼동한다. 한자로는 우리말을 온전히 적을 수 없었기에 한글을 창제했으나 오랫동안 한자에 밀려 홀대를 받았다. 한글이 모두의 문자로 자리 잡을 무렵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한글과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한글은 사대주의 극복, 그리고 자주와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이 한글이 오로지 한국어를 적는 데에만 쓰이니 한글이 곧 한국어라는 의식이 확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글은 예나 지금이나 문자이고, 자주와 독립을 내세우며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는 것이 허용되는 시대는 지났다. 자타가 공인하듯이 한글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과학적인 문자이고 그것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무한한 존경을 받을 만한 대상이다. 한국어는 사용자 수로는 세계 12위 또는 13위를 오가고 있으며 한류 열풍과 함께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지금은 한국어를 탄압하는 어떠한 외세도 없고 인구가 계속 줄어 걱정이기는 하지만 열 손가락을 살짝 넘는 이 언어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도 아직은 아니다. 그러니 한글과 한국어를 명확히 구별하며 이날은 한글이라는 문자의 날로 오롯이 기념해도 되고 기념해야 한다.

한글날, 혹은 한국어 관련 기사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외국어 간판이 즐비한 사진들, 이 간판을 이해하고 이 공간을 즐길 이들을 위한 공간이지 모두를 위한 공간이 아니니 굳이 이런 사진을 찍어 비난할 일만은 아니다. 연합뉴스

한국어의 현실에 대한 자학

“외국어로 뒤덮인 서울 거리… ‘한글 간판’ 설 자리 없다.” 문자와 언어를 혼동하는 것이 흔한 일이니 넘어갈 수 있다지만 이 기사의 제목대로라면 한글 간판은 죄다 사라지고 한국어는 들리지 않아야 한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한글날 즈음이면 ‘한국어, 국어, 우리말’ 등이 언급되면 특히 십중팔구 곧 죽어갈 중증 환자 취급을 받는다. 순수하고 건강해야 할 우리말은 병균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으며 이를 치유하지 않으면 곧 한국어는 사라지게 될 운명인 것으로 치부된다. 이런 우려가 제기된 지 수십년이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한국어는 사망선고를 받았어야 할지도 모른다. 생일의 주인공인 문자에 대한 축하가 넘쳐나야 하는데 왜 이날만 되면 주인공도 아닌 한국어에 대한 자학적 진단이 넘쳐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한국어는 곧 죽을병에 걸렸는가? 이런 진단이 있다면 진단의 근거가 되는 증세를 살펴봐야 한다. 이들이 우려하는 증세는 방송에서 넘쳐나는 외래어, 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외국어 간판, 귀로 쏟아져 들어오는 신조어들이다. 여기에 어려운 한자어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까지 더해지고 거친 말과 비속어가 추가된다. 외래어, 외국어, 신조어와 같은 병균에 감염되고 거칠고 추한 말의 공격을 받아 우리말이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바르고 고운 말에 대한 갈망과 이를 위한 노력에는 감사해야 하나 엄살은 경계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우리말의 몸 상태를 태생적인 약골로 보거나 후천적인 장애를 가진 것으로 보는 것 또한 삼가야 한다.

외래어는 다른 나라 말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우리말의 일부가 된 것이니 원칙적으로 시비를 걸면 안 된다. 외국어라고 해봤자 단어나 표현 몇 개이지 완전한 문장으로서 한국어를 대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 ‘새 발의 피’일 뿐이다. 줄임말을 비롯한 신조어들은 반짝했다 사라지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그중 일부는 널리 퍼져 함께 쓰고 있으니 탓할 일도 아니다. 이런 것들이 ‘남용’되는 것이 문제인데 특정 방송, 업계, 세대, 환경 등에서 남용될 뿐 이것이 한국어 전체를 좀먹지는 않는다. 수십년 전부터 이런 진단과 우려가 제기되었으나 한국어는 여전히 살아 있으니 본래 건강했거나 이미 내성이 생겼을 뿐이다. 일부에서 남용을 하고 있지만 대다수의 사용자 사이에서 한국어는 여전히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있으니 좋은 날 마냥 자학만 할 일은 아니다.

“한국어는 순수하고, 바르고, 고와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어는 순수하고, 바르고, 고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로는 안 된다. 한국어는 한자어, 외래어, 외국어가 끼어들지 않은 순우리말이어야 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며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도 없다. ‘바른 말, 고운 말’은 그나마 설득력이 있지만 바르고 곱다는 것의 기준은 여전히 문제가 된다. 규범, 사전, 문법서에 맞는 것이 무조건 바르고 곱다고 한다면 이것은 폭력이다. 이런 것들은 언어사용자들의 현실, 그리고 변화에 맞춰 만들어지는 것일 뿐 절대불변의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는 논리가 아닌 다른 논리가 있어야 한다.

문제는 바로 너와 나, 그리고 우리!

현실에서 외래어나 외국어가 쓰이고 있다면 이는 그 나름의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글날을 맞이해 ‘북 페스티벌’을 열겠다고 하면 ‘순수’의 기준에서는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겠지만 쓰고 보는 이들이 ‘책 잔치’보다 선호한다면 ‘무조건 안 된다’가 아니라 그 필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간판에 ‘3층, 찻집, 가배차, 푸성귀 버무리, 과자, 겹빵’이라고 쓰지 않고 ‘3F, CAFE, COFFEE, SALAD, CAKE, SANDWICH’라고 써 놨다면 이것을 읽고 이해할 줄 아는 이들을 손님으로 맞겠다는 주인장의 의지와 이렇게 간판을 달아놔서 좀 더 ‘있어 보이는’ 곳에서 즐기겠다는 손님의 취향을 인정해야 한다. 한글날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우리말 사랑의 중요성과 한국어의 순수성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을 텐데 주인장이나 손님은 왜 이런 것일까? 이들 사이의 중요한 기준은 ‘순수한 한국어’가 아니라 장삿속과 내 돈 내고 내가 먹고 마시며 얻는 즐거움이다.

이 간판을 문제 삼으려면 ‘순수의 논리’가 아닌 ‘소통의 논리’를 내세워야 한다. 이곳이 공공장소이거나 이곳에 가서 꼭 먹고 마시고 싶은데 간판을 읽을 줄 몰라서 가지 못하는 이가 많아야 한다. 공중화장실을 그저 ‘Toilet’이라고만 써 놓거나 과거의 동사무소를 ‘Community Center’라고만 써 놓아서 이곳을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이 찾지 못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영어 간판을 쓰는 이, 그것을 보고 찾는 이들 모두 우리말 사용자들이고 그들에게는 그것이 더 선호되고 소통도 문제가 없으니 이들에게는 순수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주인장이나 손님 모두 우리 주변의 사람이자 곧 ‘나’이기도 하다. 순수의 논리를 내세워 지적하는 이도 ‘나’이고 그와 상반된 행동을 하는 이는 ‘너’이기도 하다. 결국 ‘나’와 ‘너’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이다.

신조어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줄임말을 비롯한 신조어는 ‘나’도 만들었었고 ‘너’도 쓰고 있다. 새로운 말들은 늘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들의 검증을 거치며 ‘우리’ 속에 살아남는다. 그 대열에 모두가 동참해왔고 말은 그렇게 늘 새롭게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신조어 또한 신조어이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 아니라 소통의 문제이다. 새로운 말을 몰라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쓰는 사람은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꿔야 하고 듣는 사람은 모르는 말을 익히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신조어에 대한 태도의 대부분은 후자이다. 내가 못 알아들으니 불편하다는 것인데 그들도 그 말이 편하면 어느 순간 받아 쓴다. ‘너’에게 손가락질하다 ‘나’도 쓰고 있으니 결국 ‘우리’ 모두의 것이다.

말의 주인으로서의 태도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들었으나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한글 이전에도 한국어는 있었으니 한국어는 우리의 조상과 지금의 우리, 그리고 후손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세대를 거듭하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한국어는 지금도 꿋꿋하게 쓰이고 있으니 태생적인 약골이거나 후천적인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한국어가 우리에게 깃들어 있고 그 한국어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고 있으니 중환자 취급을 해야 할 이유도 없다. 문자의 생일에 굳이 언어를 바라보아야 한다면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문자에 대해서는 한없이 ‘국뽕’에 빠지다가 언어에 대해서는 자학을 해서는 안 된다. 함께 만들어가는 말인데 자책이 아닌 남 탓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모두가 말의 주인인데 주인이 스스로를 낮추고 남 탓만 한다면 한국어의 미래는 결코 밝지가 않다.

다행스럽게도 한글날만 되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한국어에 대한 자학적 기사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몇십년 전의 논조를 그대로 반복하는 보도와 통탄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그것이 옳은 것이 되려면 ‘순수’가 아닌 ‘소통’의 차원에서 다시 논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적인 필요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필요에 스스로가 동조하고 있다면 남 탓만 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문자 한글로 기록되고 있는 한국어는 여전히 건강하며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한글날 즈음의 풍경은 이날의 주인공인 한글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적는 한국어에 대한 자부심을 다지며 모두가 주인이 되어 함께 건강하게 만들어가려 노력하면 된다.

■필자 한성우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이다. 삶 속의 말과 글을 쉽게 이해하고 깊게 생각하도록 돕는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박사까지 마쳤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어규범정비위원회 위원이며, 한국방언학회 수석부회장이다. 문화방송(MBC) 우리말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문화어 수업>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꿈을 찍는 공방> <방언, 이 땅의 모든 말> 등의 책을 썼다.

한성우 국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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