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한국문학, 세계무대로 나가야 한다

김종회 문학평론가·이병주기념사업회 공동대표 2024. 10. 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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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내용의 공감대 중요, 소통 원활한 번역이 숙제
한류·세계 한국어과 개설…시대의 풍조 십분활용을
김종회 문학평론가·이병주기념사업회 공동대표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이미 하나의 상수가 된 개념이다. 수년 전 필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듀크대학에서, 이 문제에 직접 다가선 학술 콘퍼런스에 참석했다. 이틀에 걸쳐 열린 이 국제회의는 미국의 KLA(Korean Literature Association)가 주최하고, 미국 전역에 있는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발표와 토론을 벌인 뜻깊은 자리였다.

한국문학이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영어로 논의되는 현장은, 감동과 함께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바야흐로 글로벌 시대다. 문학 또한 비좁은 국가주의의 울타리를 넘어서 광활한 국제 경쟁의 무대로 나가야 옳다. 그러자면 문학의 교류와 확산, 번역과 출판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중심부로 진입하거나, 그토록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노벨문학상에 근접하자면, 이와 같은 활동을 강화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필자가 듀크대학 콘퍼런스 참석 이전에 방문하고 강연을 한 애리조나주립대학에서도, 한국문학과 북한문학에 관심을 가진 수십 명의 미국인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의 문화정책은 이 대목에 유의해야 한다. 한국문학에 비상의 날개를 달아주는 일을 모국어의 강역(疆域)에서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글로벌의 문턱을 넘어섰고, 문학은 이를 뒤쫓아 가기에도 바쁜 형국이다. 남북한 문학의 소통과 접촉 면적의 확대 또한, 해외에서 한글로 창작되는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과의 연대를 통해 미개척의 지평을 열 수 있다.

한국 옛말에 ‘꿩 잡는 게 매’라는 속언이 있다. 아무리 바탕이 굳건하고 치장이 훌륭해도 명패를 달아 내놓는 상품 자체가 뛰어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이를테면 한국어로 제작된 문학작품의 우수성으로 세계시장에서 통용되는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과 문화의 현장에서 작가를 소중히 여기고 우대해야 하는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다. 한국문학에는 이문열 황석영 신경숙 한강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 작품이 번역되어 읽히고 있는 많은 시인·작가가 있다. 이들의 성과를 더욱 강화하고 새로운 문학작품의 진출을 고무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단계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줄거리에 별반 볼품이 없다. 그런데 이 소설의 이야기는 한 가족 구성원에게 있어 ‘엄마’라는 보편적 감성대를 예민하게 건드렸다. 물론 앵글로 색슨계의 모녀 관계는 다르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꿩’을 잡았다. 거기에다 번역도 좋았다. 우선은 작가가 세계의 독자들과 만나기 위해 어떤 주제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국적을 가진 작가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전혀 일본적이지 않다.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쓴 ‘설국’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열차의 시대다.

말하자면 작품 내용에 대한 공감의 문제다. 이 지점은 작가의 역량에 따라 천양지차가 나기도 한다. 그러기에 좋은 작가, 지역과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고 감응력 있는 주제를 설정할 수 있는 작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국내에서 쌓아온 명성에만 의지해서는 어렵다. 작가는 오히려 겸허해야 하고 보다 소박한 자리에서 멀리 내다보는 ‘매’의 눈을 길러야 옳다. 예컨대 ‘대학생과 창부의 사랑’이라고 하자. 시시한 삼류 통속소설의 주제이지만, 도스토옙스키가 쓰면 ‘죄와 벌’의 첫머리가 되고, 알렉산드르 뒤마가 쓰면 ‘춘희’가 된다. 이러한 기저 위에서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논의할 때, 더없이 중요한 숙제가 원활하게 잘 소통되는 번역이다. 앞서 언급한 하루키의 경우는 그 작품의 번역, 특히 영어권 번역에 있어 세계화를 손쉽게 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먼저 하루키 자신이 번역하기 쉬운 문체를 구사한다. 이는 무라카미 류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확연하기 이를 데 없다. 하루키의 번역에 문학 인생을 건 복수의 번역가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 문단에서의 번역가 대접이 한국처럼 함부로 작가의 밑 길로 가지 않는다. 한국의 문학작품이 세계의 독자들에게 읽히기를 바라면서, 번역에다 창작에 버금가는 강세를 두지 않는다면 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 시류의 계기와 조건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거론되는 한국 작가들의 경우는 보기에 따라, 그리고 활용하기에 따라 거론만으로도 상품성이 있다. 아무런 전조도 없는 것보다는 거론이라도 되는 것이 백 번 낫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해외에 소개하고 번역된 작품을 출간하는 출판계의 노력도 상찬할 만하다. 우리도 놀랄 정도로 세계적 확대 양상을 보인 한류의 전파, 세계 각 대학의 한국어과 개설, 케이팝 수용 등의 호재를 그냥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내서는 안 된다. 바야흐로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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