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의 무게, 세계 모국어의 무게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10월9일은 한글날이다. 이날은 언어학자인 내게는 문자를 기념하는 유일한 공휴일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북한에서도 1월15일을 ‘조선글날’로 정해서 기념하지만 쉬는 날은 아니다. 남한은 1446년 음력 9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일을, 북한은 1443년 음력 12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일을 기념한다. 명칭과 날짜는 다르지만, 한글에 대한 존중과 자부심은 똑같다.
세계 여러 나라 달력을 보면 언어 관련 기념일과 주간이 꽤 많다. 유엔 같은 국제 기구부터 지역 자치단체까지 언어 관련 기념 행사도 다양하다. 2001년부터 46개국이 가입한 유럽연합은 9월26일을 ‘유럽 언어의 날’로 지정, 언어 학습 관련 행사를 지원하고 있다. 미국에서 한인의 인구가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주에서는 2019년부터 한글날을 주의 기념일로 추가했다.
언어 관련 기념일은 크게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자국어를 기념하는 날이다. 대부분 다른 나라의 지배에서 독립한 나라들이다. 20세기 초 독립한 핀란드와 아이슬란드는 각각 자국어를 기념하고 20세기 말 소련에서 독립한 조지아, 라트비아, 몰도바, 우즈베키스탄 등도 그렇다. 타국의 지배로부터 해방됨으로써 대부분 시민이 사용하는 언어를 ‘국어’로 승격한 것을 기념의 주 내용으로 삼는다. 한글날은 고유의 문자를 기념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적 저항과 해방의 상징을 기념한다는 걸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둘째는 같은 국가 안에 있는 소수자의 언어를 기념하는 날이다. 국가 단위로 기념하기도 하지만 국제 기구와 지자체 또는 민간 단체가 주최하는 경우도 많다. 언어 소수자 권리 증진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기념 행사는 역사적 의미보다 오늘날 해당 언어의 위상과 역할을 돌아보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뉴질랜드의 ‘마오리어 주간’을 들 수 있다. 1972년 9월14일 일반 학교에서 마오리어를 가르치자는 운동의 일환으로 의회에 서명서가 제출되었다. 그뒤 이날은 ‘마오리어의 날’로 알려지기 시작해 사회에서 호응을 얻었고 기념일은 일주일로 늘어났다.
셋째는 특정 언어로 집필한 문학을 기념하는 날이다. 강대국의 패권 속에서 어떤 언어로 집필된 문학 작품은 그 자체로 저항과 해방의 상징일 수 있다. 특정 언어에서 비롯한 문화 업적인 문학을 기념하는 데에는 해당 언어가 문화적 측면에서 강대국 언어와 동등하다는 자부심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배어 있다. 예를 들면 우크라이나는 1997년부터 10월27일을 ‘우크라이나 문학과 언어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한 국가 안에서 특정 지역어로 집필한 문학을 기념하는 사례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어 지역의 ‘갈리시아 문학의 날’을 들 수 있다. 1963년 시작한 이 행사는 매년 갈리시아어로 문학 활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작가를 선정해 기념해오고 있다.
언어 관련 기념일 중 국제적 기념일이 된 사례는 방글라데시의 ‘언어 운동 기념일’이 유일하다. 1947년 말 당시 동벵골(현재 방글라데시) 지역에서 사용하는 벵골어를 공용어로 인정하라는 시위가 다카 대학교에서 일어났다. 시위대를 진압하던 경찰의 발포로 인해 학생 몇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 직후 총파업으로 이어져 1954년 벵골어는 마침내 공용어로 지정되었고, 1955년부터 이를 기념하기 위해 2월21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1999년 세계 모든 언어의 가치를 존중하기 위해 2월21일을 ‘국제 모국어의 날’로 지정하자는 방글라데시의 제안이 유네스코 총회에서 수락되어 2000년부터 매년 다양한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방글라데시 언어 운동 기념일의 역사를 보고 있으면 한글날의 보편적 가치가 저절로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자국어를 자유롭게 쓰고 살아갈 수 있는 권리이다. 즉,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는 모두 가치가 있고 귀중하다. 이런 가치의 무게를 생각하면 한글날은 그저 문자만을 기념하는 것에서 나아가 어려운 상황 속에 언어를 지키고 그 가치를 이룬 위대한 언어 운동의 기념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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