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가 남긴 상처의 조각들 … 인간 회복력을 묻다

송경은 기자(kyungeun@mk.co.kr) 2024. 10. 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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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래, 英테이트모던 한국 작가 첫 단독전
7m 대형 터빈 계속 회전시켜
흘러내리는 염료로 천 염색
뚝뚝 소리 울리며 청각 자극
천장에 100여개 조각 달아
작업복 매달던 광부 오마주
이미래의 대형 설치작 'Open Wound(열린 상처)'(2024)를 감상하는 사람들. 영국 테이트모던

지난 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자 35m 높이 천장에서부터 머리 위까지 쇠사슬에 매달린 100여 개의 불그스름한 천 조각들이 시선을 압도했다. 동시에 움직이는 기계 소리,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이 거대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소리의 정체는 대형 터빈. 터빈이 공중에 매달린 채 회전할 때마다 터빈에 얽힌 파이프에서는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러고는 아래로 떨어져 이리저리 찢기고 구멍 뚫린 흰 천을 적시고 바닥에 고였다. 마치 누군가의 심장이 피를 흘리는 듯한 이 숙연한 장면은 어딘가 섬뜩하면서도 처절한 모습으로 슬픔과 애잔함, 불안 같은 연약한 정서를 건드렸다.

산업화가 남긴 상처를 형상화한 이미래 작가(36)의 대형 설치 작품 '오픈 운드(Open Wound·열린 상처)'가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미술관인 테이트 모던의 간판 격인 터빈홀에 단독으로 전시됐다. 현대자동차와 테이트 모던이 매년 작가 한 명을 선정해 터빈홀에 신작을 전시할 기회를 주는 후원 프로그램 '현대 커미션'을 통해서다. 올해의 커미션 작가로 선정된 이 작가는 이번 전시로 테이트 모던 터빈홀에 작품을 전시한 역대 최연소 아티스트이자 첫 한국작가가 됐다. 전시는 내년 3월 16일까지 이어진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와 함께 세계 3대 현대미술관으로 꼽히는 테이트 모던 터빈홀 전시에는 그간 루이스 부르주아, 올라푸르 엘리아손, 애니시 커푸어 등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아온 작가들이 참여했다. 2021년 한국계 미국작가 아니카 이가 커미션 작가로 선정된 바 있지만 한국작가로는 이미래가 처음이다. 전시 개막을 하루 앞둔 이날 전시장에서 만난 이미래 작가는 '젊은 작가로서 긴장이 되지는 않았냐'는 기자들 질문에 "사람들이 제가 되게 무서워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근데 사실 저는 다른 작업은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신이 났던 게 더 컸다"고 말했다.

작품은 우리가 겪어온 모든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이 작가는 "상업주의 자체가 어떤 흉터라고 봤고, 한 명의 작가로서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계속해서 좌절되는 경험에서 출발을 한 것"이라면서도 "상처의 무기력함보다는 상처가 열린 채로 아물지 않는 것에 방점을 뒀다. 상처와 함께 사는 것, 그리고 그 상처의 아픔과 역경, 어려움을 잊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개인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경험이 '가슴이 아프다'고 느끼는 경험과 자주 연관된다고 했다. 그는 "감동과 아픔 모두 심장을 움직이는 감정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이 보편적인 아름다움보다 조금은 흉측하고 기괴한 느낌을 주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번 전시작 역시 작가가 주로 사용해온 기계 장치나 버려진 철근, 와이어 등이 많이 쓰여 전반적으로 그로테스크한(공포스럽고 불쾌한) 분위기를 낸다. 이를 통해 산업화로 인한 환경 문제와 노동·인권 문제, 불평등 등 사회 전반에 만연한 상처를 직관적으로 표현했다.

7m 길이의 대형 터빈은 산업화를 상징하는 메인 오브제로 작가가 특수 제작한 것이다. 찢어진 천은 건설 현장에서 가림막으로 사용되는 매시 천을 인체의 피부처럼 재해석했다. 천 조각들을 천장에 매단 형태는 산업혁명 시대 유럽 광부들이 비좁은 탈의실에서 옷과 개인물품을 천장에 매달았던 것을 오마주했다. 또 기계를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 염료는 붉은 체리즙과 점성을 높여주는 메틸셀룰로오스 등을 섞어 만들었다. 다분히 실험적이다.

'오픈 운드'는 하나의 거대한 내장 기관처럼 작동한다. 4개월의 전시 동안 심장 역할의 터빈이 계속 돌면서 액체 염료를 흘려보내고, 그 아래에서 염색이 다 된 천은 건조를 거쳐 공중에 매달리게 된다. 이런 주기적인 과정을 통해 개막 당시 100여 개였던 스킨 오브제(천 조각)는 전시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최대 150여 개까지 늘어나게 된다. 이는 끊임없이 상처를 상기시키면서 인간의 회복력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이미래 작가는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미디어 아트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런던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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