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의 말이 시시하고 천박한 이유
“읽고 또 읽은 책이 있나요? 몇 번을 읽었는데도 읽을 때마다 재미있는 그런 ‘인생 책’ 말입니다. 어떤 장르의 책이건요.”
‘왜 아직 책을 읽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꼭 하는 질문이다. 사실 굳이 글자로 된 책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영화일 수도 있고 만화여도 괜찮고 어떤 사람의 이야기여도 된다고 말한다. 그 모든 것이 ‘글’은 아니지만 ‘책’일 수 있다고도 덧붙인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기가 반복해서 읽은 작품을 이야기하며 왜 그걸 반복하는지 말문을 연다.
정보가 교통하며 만들어내는 세계
책이든 영화든 무엇이건 반복해서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재밌다는 것이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오고 다르게 읽히기에 때로는 “이게 내가 몇 번이나 읽었던 그 작품이 맞나?” 하는 경이감을 느낄 때도 있다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은 본 걸 또 보느냐고 말하지만 볼 때마다 새로워서 자기도 신기하게 생각한다고 고백한다고 한다. 이 정도가 되면 그건 ‘책’이며, 책을 읽는 재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책은 ‘글’과 다르다. 이 둘이 아주 다른 것이라는 점을 의외로 사람들은 잘 모른다. 가끔은 저자들조차 그렇게 생각한다. 연관 있는 글을 모으면 그게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글이 그저 모이는 것이 아니라 모여서 하나의 ‘세계’를 이뤄야 책이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저자는 ‘글’을 잘 아는 사람이지만 ‘책’ 전문가가 아니다. 책 전문가는 편집자다. 슬프게도 한국에서 편집자는 책의 ‘꼴’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교정하고 교열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글’은 정보를 전달한다. 글을 한줄 한줄 읽으며 내 눈을 거쳐 뇌에 들어와 엮이는 것은 ‘정보’다. 반면 책은 그 정보들이 만나 ‘세계’로 구축된 것을 말한다. 세계란 ‘世界’라는 한자가 알려주듯이 정보가 서로 접촉하고 교통하며 무수히 많은 의미로 엮일 수 있는 경계가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말한다. 하나의 세계로 펼쳐진다는 것은 정보들이 엮어져 의미를 만들어내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으로 펼쳐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에는 또한 경계가 있다. 무수하다고 해서 정보가 아무렇게나 조합돼 아무렇게나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해석의 한계’에서 지적한 것처럼 “무한한 기호 현상이 ‘될 수 없는 것’”이 있다. 모호하더라도 ‘될 수 있는 것’과 ‘될 수 없는 것’ 사이에 경계가 없으면 의미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란 경계가 있는 무수한 가능성을 말한다.
그렇기에 책은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말한 표현을 따온다면 접히고 펼쳐지는 매체다. 접혀 있는 책은 책이 경계가 있는 하나의 세계임을 보여준다. 글자는 닫힌 책 안에 갇혀 있다. 그러나 그 책을 펼칠 때마다 새로운 페이지가 열린다. 책은 펼칠 때마다 다른 페이지와 다른 글들이 조합하여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펼쳐낸다. 그렇기에 책을 ‘다 읽었다’는 말은 불가능한 말이 된다. ‘전부’라는 개념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책이기 때문이다.
‘전부 안다’는 자들의 전체주의적 싸움
글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선물이 이것이다. 다 읽는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한다. 이것을 깨달으면 사람은 세계 앞에서 절대적으로 겸손해진다.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교만인지를 알게 한다.
사사키는 그의 책에서 이런 전부에 대한 교만을 ‘팔루스적 향락’이라고 말한다. 전체를 다 읽고 알고 있다는 것은 자신을 ‘우뚝 솟은 전체’로 세상에 내놓고자 하는 욕망일 뿐이다. (사사키에 따르면 현 세태의 비평가란 “전부에 대해 전부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며 전문가란 “하나에 대해 전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의 이 이야기를 가져오면 세상에서 가장 꼴사나운 싸움이 ‘전부에 대해 전부 아는’ 비평가와 ‘하나에 대해 전부 아는’ 전문가가 싸울 때다. 지금 한국에서 많은 중요한 논쟁이 이런 모양새로 난장판이 돼가고 있다. ‘전부의 전부’를 주장하는 쪽과 ‘하나의 전부’를 주장하는 쪽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전체주의적 싸움으로 말이다.)
반면 책을 읽는 사람은 벌거벗고 자신의 팔루스를 세상에 드러내려는 이 부끄러운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크나큰 행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는 이는 그것이 전부이건 하나이건 어느 쪽 방향이더라도 자신이 전부를 알 수도 없고 전부가 될 수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반복해서 읽는 책을 가진 사람만이 계속 읽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세계를 시시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펼쳐지는 경이로운 것으로 대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시시해진 삶만큼 시시한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책은 사람을 시시함으로부터 구원해준다.
책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 ‘요약’이다. 요약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요약은 읽기와 공부에서 아주 중요하다. 내가 읽으며 알고자 하는 것의 포인트를 잡아주는 것이 요약이다. 요약은 일종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요약 정리된 것을 포스트로 삼아 책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 사이사이에 생략된 것을 떠올리며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지점에서 읽은 것을 요약하는지에 따라 책은 전혀 다른 것으로 재구성된다. 책을 읽을 때마다 밑줄 치고 요약한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다.
사실 이런 점에서 밑줄이 잔뜩 쳐진 중고도서를 읽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저자의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앞서서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읽은 책’을 동시에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밑줄 쳐진 도서란 읽은 사람 수만큼의 책이 중첩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밑줄을 그어놓는 합법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이 바로 주해다. 덧붙이자면 나를 비롯해 몇몇 사람이 미주보다 각주를 더 선호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편리함의 문제를 넘어 각주는 읽기의 중첩됨을 페이지 안에 겹쳐 책이 다른 책 위에 겹쳐진 것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요약은 읽기를 전제한다. 문제는 읽지 않고 요약하고, 요약된 것만을 보는 경우다. 읽기를 생략한 요약이 무엇보다 치명적인 이유는 요약된 것은 ‘핵심’이기 때문에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에 따르면 “진실을 찾는 고된 훈련에 나서기도 전에 이미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앞서 이야기한 비평가나 전문가와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이건 하나이건 전부로서의 진실을 안다는 전체주의적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읽는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전체주의로 기울어지며 위험해진다.
‘읽지 않는 요약’의 치명적 착각
읽지 않는 요약은 이야기를 시시한 것으로 만든다. 요약만 본 사람이 요약된 것 사이에 생략된 것을 재구성할 방법은 없다. 읽지 않았기에 요약된 것 사이에 있는 것을 떠올릴 방법이 없다. 이런 점에서 읽지 않고 요약에만 익숙한 사람은 이야기를 시간순으로 재구성하는 역량이 형편없이 떨어진다. 다시 매리언 울프의 이야기를 빌리면 요약을 읽는 것에만 익숙해져서 ‘세부적인 사건의 순서를 놓치는 것’이다. 이게 요약의 가장 큰 역설이다. 요약에 익숙해지면 요약하는 역량이 사라진다.
책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진다. 역설적으로 요약된 줄거리에만 익숙해지다보면 자기 인생에서 벌어진 세부적인 사건들의 순서를 줄거리를 잡고 재배치하지 못한다. 꼼꼼하게 읽지 않았으니 회상할 것이 없고, 회상할 것이 없다보니 경로를 잡지 못한다. ‘회상의 기술’과 ‘경로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내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면 책이 열두 권”이라고 말하지만 단 한 줄도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다.
나아가 이런 요약이 삶을 시시하게 만듦을 넘어 천박하게 만드는 것은 요약이 반드시 빠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표현이기 때문이다. 매리언 울프에 따르면 우리는 문장으로 사고한다. 문장은 생각의 기회이자 한계이며 문장으로 생각하고 문장 안에서 사고한다. 그는 “느껴지는 감각의 양식이 문장”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왜 이 책을 편지 형식으로 쓰는지를 설명하며 편지의 장점은 1) 한 인간에게 보여주는 더없는 친절한 방식으로, 2) 특별한 만남을 경험하게 하고, 3) 함께 생각해보게 하는 4) 소통의 비옥한 양식이라고 말한다. 그가 편지의 특징이라고 서술한 이 네 가지는 사실상 같은 의미다. 읽기에 따라서는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요약하면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것도 저렇게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다르게 표현함으로써 미묘하게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으며 표현만이 아니라 감각 자체가 섬세해진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다. 책의 디테일은 풍부한 표현에 있다. 무엇보다 진실을 향해 가는 길에서 풍부한 문장의 섬세한 배치로 드러나는 그 ‘아름다운 궤적’을 향유할 수 없게 된다. ‘본질’에 직행함으로써 앎의 주체는 될 수 있을지언정 향유의 주체는 되지 못한다. 소비의 쾌락만 있고 향유의 즐거움은 부재한 삶, 이 삶만큼 빈약하고 시시한 것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첨예한 토론과 논쟁의 장에서 한국의 정치인에서 시작해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리더’라고 하는 존재들의 말이 왜 저렇게 시시하고 천박한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아마 자신들의 말이 조금 거칠더라도 사태의 진실, 즉 본질을 드러낸다고 생각할 것이다.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선동당한’ 어리석은 대중이 진실을 깨우치게 하려면 다소 과격하고 거칠더라도 폭력적인 말, 말의 폭력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진실을 향해 가는 ‘아름다운 궤적’, 책 읽기
아니다. 대중에게 말의 폭력이 필요해서 그렇게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구사할 말이 그런 폭력적인 말밖에 없기 때문이다. ‘리더’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책은 많이 읽었을지 모르지만, 정보의 응축이 아니라 세계의 펼침이라는 의미에서 책을 책으로 대해본 적이 없다보니 다른 사람과 세계를 책으로 대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세상을 대하는 풍부함은 없고 앎을 오직 ‘진실’을 드러내는 전체주의적 폭력의 도구로만 써왔기 때문이다. 책만 놓친 것이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놓쳤음을 보여준다.
오늘도 신문지상을 뒤덮고 있는 저들의 저 시시하고 천박한 말을 보며 절감한다. 책을 읽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책을 통해 세상과 타인을 책으로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전체주의적 유혹에서 구원하는 겸손과 풍부함 말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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