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사실[편집실에서]
기사 쓰기를 처음 배울 때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팩트(사실)입니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운 기자라면 자신의 기사에 확실하게 확인한, 많은 팩트를 담아야 독자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팩트가 뒷받침하지 않는 주장은 공허할 뿐입니다. 건조하게 사실을 전달하는 스트레이트 기사든, 의견을 앞세우는 칼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팩트’입니다. 이제는 기자뿐만 아니라 독자도 수많은 경로로 정보를 보고 듣습니다. 소셜미디어(SNS)가 대표적입니다. 언론사뿐만 아니라 정치인도, 유튜버도 팩트를 강조하며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동의하는’이란 조건에 부합하는 팩트는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똑같은 팩트를 두고 해석을 달리하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국민연금 개혁을 다룬 책 <연금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전혜원·오건호 지음, 서혜문집, 2024)은 한국에 앞서 개혁에 성공한 여러 나라를 소개합니다. 그중 영국의 사례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영국은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 정부가 ‘민영화·자유화·개인화’한 연금제도에 국가 개입을 다시 강화했습니다. 2002년 노동당 정부가 시작하고 2011년 보수-자유 연립정부가 매듭을 지었습니다. 영국은 연금제도 개혁을 위해 3인으로 연금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총리 추천으로 전 영국산업연맹 대표이자 당시 메릴린지 부회장인 아데어 터너, 재무장관 추천으로 전 영국노동조합회의 의장 지니 드레이크, 노동연금장관 추천으로 런던 정치경제대학 교수 존 힐스가 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최소한 “상태 분석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기초적인 사실을 제시하는 데 가장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국의 노인인구 부양비율이 2050년에 두 배로 뛸 것이고, 노후대책으로서 민간연금은 실패했으며, 당시의 국가연금 체계로는 광범위한 노동자들이 노후빈곤에 빠진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공유했습니다. 대부분의 영국 시민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외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사실’이 이후 연금개혁의 원동력이 됐습니다.
주간경향은 이번 호에서도 여러 기사를 독자들에게 전달합니다. 2016년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소멸은 늦춰졌는지’ 알아봤습니다. 제주에서 당사자인 해녀들의 목소리를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확전으로 향하고 있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양상과 전망을 정리했습니다. 9월 26일 열린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공청회에서 단상을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다 연행된 활동가의 사연도 들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팩트’만 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외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사실’은 실었습니다.
홍진수 편집장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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