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풍경] 세종, 그 이름에 걸맞은 품격... 이 도시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

최흥수 2024. 10. 9.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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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이응다리와 '국립' 전시관
해가 지자 금강을 순환하는 이응다리에 경관조명이 은은하게 켜지고 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이름을 딴 세종시의 상징이다.

'조선 제4대 왕(1397~1450). 이름은 도(裪). 자는 원정(元正).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였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으며 측우기·해시계 따위의 과학 기구를 제작하게 하였다. 밖으로는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고, 쓰시마섬을 정벌하여 왜구의 소요를 진정시키는 등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표준국어대사전이 정리한 세종대왕의 간략한 업적이다. 세종특별자치시는 국내에서 인명을 따서 지은 유일한 도시다. 애초 수도로 구상했다가 행정중심복합도시로 급이 낮아졌지만, 대왕의 이름을 빌렸으니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국립'을 내세운 특별한 전시관과 박물관이 유난히 많은 도시다.


한글 상징 이응다리와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세상에 내놓은 지 올해로 578돌이다. 그러나 그의 묘호를 딴 도시 세종에는 세종이 없다. 내세울 만한 상징물은 서울이 선점했다. 세종대왕 동상은 일찌감치 광화문에 자리 잡았고, 국립한글박물관은 2014년 용산에 문을 열었다.

세종에는 2022년 개통한 이응다리가 유일한 상징물이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을 연결하는 동그란 모양의 걷기 전용 다리로 길이 1,446m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해를 상징한다. 위층은 산책로, 아래층은 자전거 전용으로 나눠진 독특한 구조다. 국내에서 가장 긴 보행 전용 교량이자 세종시의 자존심이다.

금강 북측의 이응다리 전망대. 높이가 조금 아쉽다.
경관조명이 켜진 이응다리 뒤로 세종시의 불을 환하게 밝힌 고층빌딩이 금강 수면에 비치고 있다.
금강에 설치된 이응다리 뒤로 세종시 도심 풍광이 펼쳐진다.

다리 북측 입구에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꼭대기에 서면 한글 이응(ㅇ)이 좌우로 펑퍼짐하게 금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높이가 다소 아쉬워 완전한 원 모양은 확인되지 않는다. 산책로에는 갖가지 조형물과 쉼터가 조성돼 있다. 느리게 흐르는 강물처럼, 세상 전부를 아우르는 동그라미처럼 원만하고 느긋하게 걷기 좋은 다리다. 볕이 따가운 낮보다 밤에 더욱 운치 있다. 산책로와 조형물에 경관조명이 켜지고, 강 건너 고층 아파트와 빌딩의 불빛이 잔잔한 수면에 아른거린다.

세종시 행정타운 중앙에 밀마루전망대가 있다. 설명서에는 동서남북 어디서든 도시의 모습을 관람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하는데, 막상 전망대에 오르면 주변 고층 건물보다 낮아 조망이 썩 뛰어나지는 않다. 전망대는 도시가 형태를 갖추기도 전인 2009년 해발 98m 야트막한 언덕에 42m 높이로 세워졌다. 말하자면 시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위 관료나 방문객에게 정부청사의 공사 진척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지었다. 덕분에 여러 건물이 연결된 정부세종청사의 윤곽은 한눈에 파악된다.

밀마루전망대에서 본 정부세종청사. 15개 건물을 연결해 옥상정원을 조성해 놓았다.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의 억새 뒤로 고층빌딩이 솟아 있다.
축구장 12개 크기의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은 세계 최대의 옥상정원으로 인증받았다.

업무나 민원이 아니라도 정부세종청사를 방문할 이유는 충분하다. 15개 청사를 연결한 건물 지붕 전체가 정원으로 꾸며져 있기 때문이다. 총길이 약 3.6km, 축구장 12개 면적에 해당하는 세계 최대 옥상정원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허브원, 약용원, 유실수원 등으로 구분된 정원에는 310종 144만 본의 풀과 나무가 자라고 있어 계절에 따라 특색 있는 풍경을 선사한다. 산책로는 성곽 둘레를 돌며 안팎의 경치를 구경하는 순성놀이에 착안해 설계했다. 건물과 건물을 연결한 길을 따라 걸으면 도심 도로와 고층빌딩, 멀리 계룡산 능선까지 조망된다.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의 정자와 도심 고층빌딩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에서 고층빌딩 사이로 계룡산 능선이 보인다.

옥상정원은 3개 코스로 나눠 하루 3회 숲해설사가 동행한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1코스(1.4km)에는 사과, 체리, 아로니아 등 다양한 과일나무가 심겨 있다. 약용원에는 강활, 작약과 함께 철쭉을 식재해 봄에 특히 아름답다. 오후 1시 30분 시작하는 2코스(1.6km)는 도심을 둘러보기 좋은 길이다. 안개정원, 생태연못과 정자, 수목이 어우러진 암석원 등이 조성돼 있다. 오후 3시 30분 출발하는 3코스(1.4km)에서는 100m 길이의 계단형 분수, 현무암에 이끼와 바위솔 등이 장식된 석부작 정원을 관람할 수 있다. 코스당 90분간 진행되며 네이버 ‘세종청사 옥상정원’에서 예약(회당 50명)하거나 현장 접수로 관람할 수 있다.


세종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국립 시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설계된 도시답게 세종에서만 누릴 수 있는 국립 시설이 여럿 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면 한두 곳 골라 관람할 만하다. 국립세종수목원이 대표적이다. 국내 최초의 도심형 국립수목원으로 세종중앙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온대 중부지역 식물을 체계적으로 보전하고 도심 속 전통과 숲 체험 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조성했다는 명분을 내세우는데, 가장 눈에 띄는 시설은 국내 최대 유리온실이다. 내부는 열대온실, 지중해온실, 특별전시온실 3개로 구분된다.

국립세종수목원 사계절온실의 열대온실 풍경.
국립세종수목원 전통정원 숲 뒤로 빌딩 숲이 펼쳐진다.
정조의 부용지를 재현한 국립세종수목원 별서정원.

열대온실에는 열대우림에 서식하는 8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천장 가까이까지 쑥쑥 자란 나무들이 밀림을 연상시킨다. 월평균 18도 이상 기후 지역을 주제로 조성한 온실이라 겨울철에 특히 인기 있다. 지중해온실은 스페인 알람브라 궁전을 비롯한 지중해식 건축 모형과 200여 식물이 어우러져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실 꼭대기에 오르면 야외 수목원 뒤로 세종 도심의 고층빌딩이 신기루처럼 보인다. 수목원은 시간으로 완성된다. 개장 4년을 넘기며 성장한 숲이 치솟은 마천루와 어우러져 있다.

야외 공간은 수목원을 곡류처럼 휘감은 인공연못(청류지원)을 중심으로 무궁화원, 단풍정원, 담장정원, 소나무길 등 여러 정원으로 구분된다. 전체를 둘러보려면 한나절은 족히 걸린다. 탐방객이 빠지지 않고 가는 공간은 한국전통정원(별서정원)이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학문을 논하고 휴식과 풍류를 즐긴 부용지와 정자를 재현해 놓았다.

대통령기록관도 세종이기 때문에 들어선 기관이다. 내부는 석재, 외부는 유리로 마감해 독특한 인상을 풍긴다. 정육면체 외관은 국새 보관함을 형상화했다. 대통령기록물의 중요성과 영구성을 표현했다고 한다.

옥새 보관함을 본떠 지은 대통령기록관.
대통령기록관의 선물전시실에 몽골 대통령이 기증한 황제 행렬 조각이 전시돼 있다.
대통령기록관에 남아공 대통령이 선물한 독특한 문양의 체스 세트가 전시돼 있다.

전시관은 역대 대통령이 남긴 문서와 집기, 업무 공간 등을 사진과 영상으로 보여준다. 각 대통령이 남긴 글귀(서예 작품)나 어록을 보면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을 수 있다. 대개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외국 정상(혹은 대표단)과 교류하며 받은 선물을 모아 놓은 전시관이 눈길을 잡는다. 그리스 대통령의 금제 월계관, 영국 대사의 서재 모양 찻주전자, 몽골 대통령의 금제 황제 행렬, 남아공 대통령의 토속 인형 체스 세트, 인도 총리의 금장식 꽃문양 항아리 등 하나하나가 보물 같다. 각 나라의 전통과 중시하는 가치가 고스란히 읽힌다.

시 외곽 노적산 자락에는 우주측지관측센터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초정밀 우주측지기술을 구축·운영하는 시설이다. 수십억 광년 떨어져 있는 준성(퀘이사·광학적으로 별과 구별이 되지 않는 천체)의 전파를 지구상 두 지점 이상에서 동시 수신해 GPS보다 더 정확한 좌푯값을 제공하는 첨단 시스템(VLBI)을 갖추고 있다.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 3번째다. 직경 22m, 높이 28m의 국내 최대 전파망원경이 단연 눈길을 잡는다. 우주나 천체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충분히 흥미로운 시설인데, 기본 지식 없이는 센터 명칭부터 전시 설명문까지 외계 언어처럼 생소하다. 해설 프로그램이 없어 더 아쉽다.

우주측지관측센터 언덕에 국내 최대 규모의 전파망원경이 설치돼 있다.
세종국립어린이박물관 로비의 의자. 어린이를 동반해야 관람할 수 있다.
세종국립어린이박물관에서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우주 천체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지난해 말 개관한 세종국립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를 동반하지 않으면 입장할 수 없는 특별한 박물관이다. '박물관'에서 풍기는 고루한 느낌 없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로비 의자부터 알록달록 요란한 색상과 디자인이다. 전시실은 자연과 공존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함께 살아가야 할 도시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꾸며졌다.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기보다 마음대로 뛰어다니며 오감으로 받아들이도록 설계해 놀이터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초등학생 저학년 이하 어린이를 동반한 여행객이라면 눈여겨볼 만하다.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세금을 달가워할 사람이 있을까. 국세청 건물에 문을 연 국립조세박물관은세금에 대한 이런 저항감을 해소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래 납세자인 청소년에게 세금의 중요성을 알리고 국세 행정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교육의 장이라 소개한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건 죽음과 세금뿐’이라 일갈한 미국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의 어록이 박물관의 고백처럼 걸려 있다.

국세청에 문을 연 국립조세박물관.
책을 펼쳐 놓은 모양의 국립세종도서관.
국립세종도서관의 계단식 열람실.
세종특별자치시 여행 지도. 그래픽=이지원 기자

대부분 설명 위주의 전시여서 자칫 따분할 수 있는데, 창문세·오줌세·독신세·모자세 등 상상을 초월하는 세목을 소개하는 대목이 흥미를 끈다. 불황기에 감세를 요청한 푸줏간 주인, 죽은 남편에 부과된 군미를 고발한 아내 등 옛 문헌 속 세금 이야기도 눈길을 잡는다.

국립세종도서관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책장을 넘기다 엎어놓은 듯한 독특한 모양의 건물에 서고, 열람실, 카페테리아 등을 갖추고 있다. 넓은 창으로 환하게 빛이 들어오는 계단식 열람실이 카페처럼 아늑하다.

세종=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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