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은 TSMC·하이닉스에 밀리고 ‘범용’은 중국에 쫓겨
8일 전영현 삼성전자 DS(반도체)사업부장이 올 3분기 잠정 실적 발표 때 내놓은 사과문에는 스스로 진단하는 ‘삼성전자 위기론’의 원인이 간명하게 정리돼 있다. ‘기술의 근원적 경쟁력’과 ‘미래 준비’의 부재, 그리고 신뢰가 사라진 조직 문화다. 삼성전자의 사과문은 반성문이기도 하다.
◇ “기술의 근원적 경쟁력 복원”
전 부회장은 사과문에서 “기술의 근원적 경쟁력을 복원하겠다”며 “세상에 없는 새로운 기술, 완벽한 품질 경쟁력만이 삼성전자가 재도약하는 유일한 길”이라며 기술 경쟁력 제고를 첫 번째 과제로 내세웠다.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가 직면한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수율(완성품 중 정상품 비율)이다. 수율은 초미세 공정으로 갈수록 높이기 어렵기 때문에 반도체 기업의 생산성·수익성·기술력을 가늠하는 지표로 여겨진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5세대 D램 생산공정(1b D램) 수율 경쟁에서 SK하이닉스에 밀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공정에서 생산되는 ‘DDR5′ 같은 메모리 반도체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핵심 부품으로, 앞으로 성장성이 크다. 이런 핵심 사업의 경쟁력이 처져 있다는 것이다.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에 쓰일 6세대 D램(1c D램) 양산도 SK하이닉스가 먼저 성공했다. 한 반도체 스타트업 대표는 “SK하이닉스의 6세대 D램의 수율이 60%라고 알려진 반면, 삼성전자는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며 “HBM과 LPDDR, GDDR 등 D램 파생 상품에 쓰이는 핵심 D램의 경쟁력이 흔들리는 상황이다”라고 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현재 대만 TSMC와 삼성전자의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시장 점유율 격차도 수율 때문이라고 본다. 반도체 생산을 맡기는 고객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수율이 높은 회사에 제품 생산을 맡겨야 적기에 공급을 받을 수 있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TSMC의 최첨단 3나노미터(1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 공정 수율은 삼성전자를 10%포인트 이상 앞서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2분기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TSMC 62.3%, 삼성전자 11.5%이고, 그 격차는 조금씩 더 벌어지고 있다.
◇”미래를 보다 철저히 준비”
전 부회장은 “미래를 보다 철저히 준비하겠다”며 “가진 것을 지키려는 수성(守城) 마인드가 아닌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도전 정신으로 재무장하겠다”고 밝혔다. 파이낸셜타임스(F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들은 이를 AI시대에 뒤처진 데 대한 반성으로 해석했다.
삼성전자는 PC·스마트폰 메모리 시장에 안주하면서 2020년 전후로 열린 AI 반도체 시장을 등한시했다. 차세대 반도체인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에서도 경쟁사에 밀리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5년 말 2세대 HBM 양산은 SK하이닉스보다 빨랐지만, 2019년 3세대부터는 역전당했다. 엔비디아로의 HBM 납품은 언제 이뤄질지 미지수다. 삼성 출신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모바일 시대로의 전환이 됐을 때, 삼성전자는 애니콜을 버리고 갤럭시라는 새로운 스마트폰 브랜드를 빠른 속도로 내놓으면서 시장의 변화에 대비했다”며 “하지만 AI 반도체 시대에 들어설 때 쉽게 방향 전환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유병준 서울대 교수는 “삼성이 AI 시대에 내놓은 기술은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AI 기능 외에는 특별한 걸 보여주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PC·모바일 중심의 메모리에 안주하면서 AI 시대에 대한 준비나 신사업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매쿼리는 지난달 삼성전자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삼성전자 D램 매출에서 PC·모바일 의존도가 상당히 높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HBM 연구 개발을 지속해오다가 예상보다 수요가 없고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2019년 팀을 해체했다. 당시 삼성전자의 HBM 관련 전문 인력이 상당수 경쟁 업체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재편하고 있는 세계 반도체 공급망도 삼성전자에 유리하지 않다. 미국의 강력한 기술 제재를 받고 있는 중국은 반도체 자립을 위해 반도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범용(구형) 반도체 생산을 늘리고 있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 반도체의 중국 내 매출도 지지부진하다. 반면 고객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텍사스 테일러에 짓기 시작한 파운드리는 가동 시점을 기존 2024년 하반기에서 2026년으로 연기했다.
◇ “조직 문화를 재건하겠다”
전 부회장은 “우리의 전통인 신뢰와 소통의 조직 문화를 재건하겠다”며 기업 문화를 지적했다.
업계에선 삼성전자 반도체 경쟁력 하락의 원인이 결국 인력과 소통의 문제라고 본다. 반도체는 재료와 장비, 그리고 미세 회로 작업이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생산 공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빠른 피드백을 통해서 이를 계속 수정하면서 수율을 올린다. 경험 많고 유능한 인력과 원활한 소통이 필요한 이유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에서 핵심 공정에 투입되는 인재들이 해외 등 외부로 빠져 나가고, 새로 충원되는 인력은 경험과 열정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며 “이런 상황이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문제가 커진 것”이라고 말했다.
☞HBM(고대역폭 메모리)
데이터를 읽고 쓰는 메모리 반도체 D램의 일종. 스마트폰이나 PC에 쓰이는 범용 D램과 달리 HBM은 D램을 여러 단 쌓아 만든 제품으로 대용량 데이터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 대규모 연산을 초고속으로 처리해야 하는 AI에 특화된 반도체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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