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상처 많은 유년일지라도
요즘 MZ세대에게 사랑이란, 결혼이란 무엇일까? 언젠가 이맘때 결혼을 앞둔 여성이 상담실을 찾아왔다. 자신의 과거가 싫다는 민들레(가명)씨였다. 그는 지방 대학에서 서울로 편입한 뒤 가끔 남동생과 연락하는 것을 제외하곤 모든 사람과 관계를 끊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도박과 알코올중독, 폭행을 겪었고 가출한 엄마 대신 알바를 하며 생계를 책임져 왔다. 어렵게 대학에 진학한 뒤 학교까지 찾아오는 아빠를 피해 서울로 온 것이었다. 대신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해 ‘스펙’ 쌓기에 매진했다. 그렇게 대기업에 취직했고, 끔찍했던 어린 시절을 보상이라도 받듯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많이 불안해 보였다. 힘겨운 목소리로 “내 사랑은 꽤 남는 장사지만 너무 조건만 따지는 ‘찌질한 사랑’ 같다, 이렇게 자신을 상품처럼 팔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자기 발로 찾아와 자조하는 어투로 물었을 때, 그가 해답을 듣고 싶은 것은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자기 행위에 대한 어떤 확인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는 많은 것을 숨겼지만, 상담을 통해 몇 가지 단서가 잡혔다. 감추고 싶었던 가정환경, 들키고 싶지 않은 열등감, 낮은 자존감 등등….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갑자기 수면 위로 올라오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 컸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동안 애써 온 자신에 대한 ‘인정’이었다. 온갖 악조건을 견디며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 낸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자신감, 세상의 평가가 어떻든 본인이 선택한 행위에 대한 확신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말해줬다. “지금 결혼하려는 남자가 왜 좋은지 이유를 찾아보세요. 바로 그것 때문에 ‘이 사람과 결혼하려는 거’라는 당신 생각이 맞아요.”
당시 그에게 ‘누더기 외투를 입은 아이’라는 그림책도 한 권 소개해줬다. 아무리 보기 싫은 누더기 외투라도 비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막아주는 소중한 보호막이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몇 년 뒤 민들레님은 아이를 키우며 남편과 행복하게 지낸다고 안부를 전해왔다. 마침 내가 소개해줬던 그림책을 아이에게 읽어주다 생각이 나서 전화한 것이었다.
상처 없는 삶은 없다. 온갖 아픈 기억으로 점철돼 무가치한 줄 알았던 유년의 삶도 민들레씨에게 결코 무의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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