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칸’ 같은 사람의 ‘바람’ 같은 존재감[서광원의 자연과 삶]〈95〉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로마 교황청을 담당하는 사진 기자들의 카메라가 큰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닌데도 바쁠 때가 있다.
연설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성베드로 광장으로 나온 교황의 모자(추케토)가 바람에 획 날아가거나 옷이 얼굴을 다 덮어버리는 '사고'가 생길 때다.
더러 교황까지 당황스럽게 하는 홱 몰아치는 바람 같은 사람도 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다른 존재를 드러나게 해주는 빈칸 같은 사람도 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어 존재가 없다고 할 수 있는 바람이지만, 이 없는 것이 엄연하게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만들어 낸다. 얼마 전 끝난 파리 올림픽에서 양궁 선수들의 심박수를 오르내리게 하며 메달 색깔을 좌지우지했던 것도 상당 부분 바람이었고, 여름 내내 고대하던 가을이 온다는 걸 알려주며 우리가 입는 옷을 싹 바꾼 것 역시 그렇다. 없다고 없는 게 아닌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게 또 있다. 지금 이 글에서 띄어쓰기가 없다면 어떨까? ‘대략 난감’을 넘어 읽는 걸 포기하는 일이 속출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빈칸이 있어 이 신문에 실린 수많은 정보를 쉽게 읽을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아무 쓸모도 없을 것 같은데 외려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을 한다.
한 조사에 의하면, 영국인들은 자신의 결혼기념일이나 자녀의 생일은 잊어도 우편번호는 기억한다. 혹시 이걸 잊으면 큰일 나는 걸까? 그게 아니라 인간을 잘 아는 심리학자들이 만든 덕분에 기억하기 쉬워서다. 영국의 우편번호는 ‘MW5 9EG’ 식으로 되어 있는데, 눈에 쉽게 들어오는 숫자를 가운데에 두고, 잘 들어오지 않는 자음을 양쪽 끝에 배치하면서, 중간에 빈칸을 두어 구별하기 쉽게 한다.
우리야 별로 쓰지 않아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영국인들은 아주 쉽게 기억한다. 아무런 값이 없는 숫자 영(0)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듯, 상품 판매대의 빈 공간이 그냥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인기를 말해 주듯 빈칸 역시 없음으로 있음을 만든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렸던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창업주가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회사 초기, 술자리에서 내 옆에 와 ‘사장님을 존경합니다. 영원히 옆에서 도우며 충성하겠습니다’라고 외치던 간부 중 지금 나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힘들고 어려울 때 다 도망갔다. 오히려 조용히 있던 평범한 직원들이 나와 끝까지 함께했다.” 빈칸 같은 사람이 진짜라는 얘기였다.
바닷가 나무들이 보이지 않는 바람의 영향을 받아 한쪽으로 쏠리는 모양을 하고 있듯 우리 역시 어떤 보이지 않는 영향을 받는다. 더러 교황까지 당황스럽게 하는 홱 몰아치는 바람 같은 사람도 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다른 존재를 드러나게 해주는 빈칸 같은 사람도 있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의 내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것 역시 내가 모르는 빈칸 같은 누군가의 덕분일 수 있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민주-의협 ‘정부 뺀 협의체’ 논의…李 “정부 개방적으로 나와야”
- 귀국 尹, 마중나온 韓과 대화없이 악수만…24일 만찬 ‘갈등 분수령’
- ‘의료계 블랙리스트’ 작성 32명 중 30명은 의사…2명 의대생
- 檢, ‘文 前사위 특채 의혹’ 관련 前 청와대 행정관 27일 소환
- 곽노현, 진보 교육감 단일화 경선 탈락…강신만-정근식-홍제남 압축
- 이재명 사법리스크 재점화에…민주당 “법 왜곡죄 상정”
- “거짓말처럼” 하루만에 8.3도 뚝↓…불쑥 찾아온 가을
- 故장기표, 김문수에 “너부터 특권 내려놓으면 안되겠나”
- “연금개혁안 도입되면 75·85·95년생 150만원 더 낼 수도”
- “천석꾼 가세 기울었어도, 독립운동 아버지 원망은 이제 안 해요”[동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