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대비되는 마음

기자 2024. 10. 8.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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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서 장난처럼 ‘성당 다니며 성당 오빠 없었냐’ 물을 때면 스치는 얼굴이 있다. 20대 후반 무렵 청년모임에서 알고 지낸 그는 혀끝과 글자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당시 내 지인들과 결이 좀 달랐다. 사진을 배우려는 후배한테 난해한 이론을 설명하는 대신 낡은 카메라를 고쳐 연습해보라며 건넸고, 북소리를 좋아한다 했더니 ‘꽹과리만 한 조그만 애가 북은 무슨’ 피식거리며 담배 연기를 뿜던 복학생 선배와 달리 북은 힘이 아닌 반동으로 들어 올리는 것이라며 오북놀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해줬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미사 후 끼니를 때우러 분식집에 들어가 유부우동을 두 입쯤 먹었는데 문자메시지가 왔다. 여럿이 삼겹살 구우러 간다며 너 어디냐길래 이미 저녁 먹고 있다 했더니, 그 맛없는 걸 얼른 해치우고 여기 합류하란다. “전 절반 먹으면 배부른데. 다 버릴 수도 없고요.” 얼마 안 되어 그가 식당에 들어섰다. 선 채 성호를 긋더니 세 젓가락 만에 우동을 후루룩 삼키고 고깃집으로 이끌었다. “맛없는 건 원래 혼자 먹으면 안 되는 거야.” 그 말이 좋아서 기억해뒀다.

몇 계절 지나 난 타국으로 공부하러 떠났다. 환송 자리에서 동부의 혹독한 추위 얘기가 나왔다. 나중에 겨울 잠바를 부쳐준다길래 말씀만으로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심한 눈보라가 일어 기숙사에 갇혀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너 얼른 주소 불러봐.” 빈말로도 고마운 일을 실행에 옮길 줄 상상 못했다. 당황해서 괜찮다던 내게 “이미 우체국에 왔다니까? 주소나 불러!” 하던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일주일이 안 돼 털모자 달린 점퍼가 도착했다. 그때껏 가져본 것 중 제일 질 좋은 겨울옷이었다. 난 감동했고, 이내 액수에 맞는 선물로 그 감동을 표해야겠단 의지에 불탔다. 그는 초콜릿이나 한 봉지 보내라 했으나 어느 시절인데 예스럽게 ‘미제 쪼꼬렛’인가. 주머니가 빠듯했기에 오히려 더 강박적으로 급에 집착했다. 눈 쌓인 상점거리를 돌던 중 고급문구점 진열대에서 “70% 할인” 팻말이 붙은 명품 다이어리를 봤다. 저거다. 한 개 남은 걸 포장해 달래서 우체국으로 향했다. 몇 주 후 그에게서 잘 받았단 메일이 왔다. 속지에 날짜 표시가 없어 매년 잘 쓰겠다고 적혀 있었다. 물품을 미처 살피지 않고 보냈으니 그게 무슨 얘긴지 알 턱 없었다.

이듬해 봄, 다른 도시에서 공부하던 선배 언니가 다녀가면서 예쁜 문구류를 건넸다. 크리스마스 지나면 그해 다이어리를 저렴하게 파는데 네 생각이 나서 하나 더 사뒀다며, 작년 날짜니 속지는 바꿔 쓰라고 하셨다. 아차 싶었다. 내가 보낸 게 전년도 상품이었구나. 그의 말대로 속지에 날짜 표시가 없었을까? 그랬더라면 굳이 언급했을 리 없다. 철 지난 달력만큼 김새는 선물에 서운함을 감추려 둘러댔을 테다. 진심으로 미안했다. 서투르게 사과하면 도리어 자존심 상하게 할 성싶어 나중에 만나 설명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흘렀고, 그는 결혼해 아이 아빠가 되고 난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차 출국했으니. 10여년도 더 지난 일이다.

‘잘해볼걸’ 식의 아쉬움이 일었던 건 아니다. 다만 미안함은 오래도록 남아, 각별한 이들의 감정을 다치게 한 스스로가 미워지는 순간마다 떠오르곤 했다. 예전에 그는 준 만큼 즉각 돌려받기 위해 베풀었던 게 아니었으며 가격에 맞춘 답례보단 기뻐하는 상대방을 보고 싶어 했을 테다. 그해 겨울 소포를 받고 의아한 점이 있었다. 배송란에 적힌 액수가 털점퍼 가격치곤 낮았단 건데,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일정액 이상이면 통관이 지연되거나 수신인에게 과중한 관세가 부과될 수 있음을. 받는 이가 행여 곤란해지지 않도록 금액을 낮게 기재했던 거다. 비싼 선물로 보이고 싶어서 폭탄세일에 기웃거렸던 나와 대비되는 마음. 그 마음으로 사람을 마주하고 사랑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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