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먼에 대한 ‘초심’ 언제까지 [아침햇발]

안선희 기자 2024. 10. 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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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5월10일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안선희 | 논설위원

3303자밖에 안 되는 짧은 내용에 ‘자유’라는 단어가 무려 35번이나 들어간 기이한 취임사가 나왔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그 이전 윤석열 대통령이 2019년 7월 검찰총장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국회에 보낸 답변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으로 밀턴 프리드먼(1912~2006)의 ‘선택할 자유’(1980)를 꼽았던 때부터였을까? 감세와 작은 정부, 규제 완화, 시장 중심주의 등을 뼈대로 하는 프리드먼식 신자유주의에 대해 윤석열 정부가 ‘초심’을 잃지 않으리라는 것이 예견된 것은.

애초 프리드먼의 수제자 후보는 이명박 정부였다. 취임사에서 아예 “‘작은 정부, 큰 시장’으로 효율성을 높이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세금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투자와 소비가 살아납니다”라고 감세 정책을 못박았고 “기업은 국부의 원천이요, 일자리 창출의 주역입니다”라며 ‘비즈니스 프렌들리’ 기조를 공언했다. 대통령 당선 이후 열흘 만에 처음 방문한 외부 기관은 전국경제인연합회였다. 집권 첫해 소득세,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등을 망라하는 60조원이 넘는 규모의 대대적 감세를 추진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서민경제 침체, 2010년 지방선거 패배 등을 거치며 이명박 정부는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201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공정사회’가, 2011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공생발전’이 어젠다로 제시됐다. 동반성장위원회를 출범시켰고,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과세, 대형마트 휴일 영업 규제 등을 도입했다. 2011년에는 소득세와 법인세의 최고 세율을 유지하기로 하는 등 감세 정책을 사실상 중단한다. ‘낙수효과는 없다’는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애초부터 방향이 조금 달랐다. 취임사에서 “(우리는) 계와 품앗이라는 공동과 공유의 삶을 살아온 민족”이라며 “그것이 방향을 잃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말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가 추구하는 경제의 중요한 목표”라며 ‘경제민주화’를 강조했다. 비록 그 뒤 ‘창조경제’를 내세우며 경제민주화를 뒷전에 두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말이다. 소득공제를 대폭 줄이는 세제개편 등을 통해 증세를 단행하기도 했다.

프리드먼이 다시 소환된 것은 윤 대통령이 유력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면서다. 2021년 7월 윤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에서 “상부에서 뭐 이런 거 단속해라 저런 거 단속해라, 하는 (식품위생) 단속 지시가 막 대검 각 부서를 통해서 일선 청으로 막 내려오는데, 이제 프리드먼의 책을 이렇게 보면은 거기에 다 나와요, 이런 거 단속하면은 안 된다… 프리드먼은 그것보다 더 아래도… 부정식품이라 그러면은 없는 사람들은 그 아래 것도 선택할 수 있게 더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줘야 된다 이거야…”라고 말해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윤석열 정부가 충실하게 지키고 있는 프리드먼의 ‘교리’는 감세 정책과 작은 정부다. 집권 첫해 법인세, 종부세, 상속·증여세 등에 걸쳐 5년간 감세효과가 60조2천억원에 이르는 세제개편안을 내놓았다. 지난 7월 발표한 세제개편안에도 상속세 인하 등 5년간 18조4천억원 규모의 감세 방안을 담았다. 종부세와 금융투자소득세는 아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잇단 감세에 국세수입액은 2022년 395조9천억원, 2023년 344조1천억원, 2024년 337조7천억원으로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올해 정부 예산안의 총지출 증가율은 2.8%로 20년 만에 가장 낮았다. 심지어 지난해 올해 예산안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추경호 당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예산 동결’을 검토하기도 했다고 자랑스레 밝혔다. 지난 8월 발표한 내년 예산 증가율도 3.2%에 그친다. 모두 경상성장률을 밑도는 초긴축 예산으로 사실상 정부 규모를 축소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국의 신자유주의 진영에서 주창하는 ‘야수 굶기기’라는 정치적 전략이 있다. 감세를 추진해 그 결과 정부 수입이 줄어들면 정부 지출을 감소시켜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못 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지금도 내수 부진이 계속되고 있지만 민간 투자와 소비를 보완해야 할 정부 역할은 실종된 것처럼 말이다. 윤석열 정부가 정부를 굶기고 있는 사이 말라가는 것은 국민이다. 총선에서 참패하고 국정 지지율이 20%대 최저치를 맴돌고 있지만 윤석열 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프리드먼의 수제자 노릇에 여념이 없다.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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