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마법의 주문을 외우면
지난달, 대만에 인접한 일본의 작은 섬 미야코에 다녀왔다. 미야코섬은 ‘미야코 블루’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본에서도 아름다운 휴양지로 알려져 있는데, 최근 진에어 항공이 직항 노선을 개설했다. 목적지는 2008년 9월 세워진 ‘아리랑의 비’. 낯선 미야코섬으로 간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을 추모하기 위해 미야코 주민들과 한·일의 연구자들이 함께 이 비를 세웠다. 미야코에서는 매년 9월마다 추모비 건립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물이 귀한 섬이라 위안소에서 우물까지는 먼 길을 걸어야 했다. ‘위안부’ 여성들은 미야코 주민들과 함께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며 교류했다고 한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요나하 히로토시는 그 기억을 간직한 채 우물을 오가던 그녀들이 잠시 쉬어가던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왔다. 지금 그 자리에 아리랑의 비가 세워졌다. 그 옆에 과거 일본군 비행장이, 현재 자위대 공군기지가 있다.
요나하를 비롯해 연로한 미야코 주민들은 ‘아리랑’을 알고 있었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부르던 노래라며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무더운 남쪽 섬 날씨에 지쳐 ‘아이고’ 한마디 내뱉으면 그 말을 알아들었다. 기념행사에서 주민들이 부르는 아리랑을 듣자니 기분이 묘했다. 한국사회는 그곳에 끌려간 여성들을 잊었지만, 그녀들의 노래는 미야코 주민들의 입을 거쳐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나는 글이 노래를 이기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많다. 노래는 문장보다 울림통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대상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글의 미덕이라면, 음악은 감정을 풍성하게 담아 대상을 노래한다. 그래서 노래는 글보다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고, 글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말로는 다할 수 없을 기구한 삶과 전쟁의 체험을 ‘아이고’ 탄식하는 소리에, 아리랑 노래에 담았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미야코 주민들도 전쟁의 괴로움을 겪었다. 아리랑의 비 옆에는 미야코에 배속되어 전쟁을 겪은 한 위생병의 노래를 새긴 추모비가 있다. “아사한 병사의 시체를 소각하는 미야코여, 8월은 지옥.”
미야코의 아리랑은, 말하자면 조선인 ‘위안부’의 증언을 전하는 2차적 증언이다.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면서 노래는 더 많은 사연이 담긴다. 거기엔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미야코 주민들의 가해자성에 대한 성찰이나, 참혹한 전쟁의 기억까지 풍성히 담겼다. 미야코 주민들에게 ‘위안부’의 아리랑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전쟁 체험을 표현하고 평화의 기원을 담는 언어가 되어준 것이다. 물론 미야코 주민들이 아리랑을 부르는 건 단순히 마음이 괴로워서가 아닐 테다. 처음 ‘아이고’는 그저 흘러나온 탄식 소리에 지나지 않지만, 굳이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며 그 소리를 언어로 삼는 건 타인에게 무언가 전하고픈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현재 대만해협과 남중국해에서 전쟁의 위기감이 커져가고, 미야코섬은 그 한복판에 놓여 있다. 가자학살은 이제 1년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중동 일대로 전쟁을 확산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도 갈수록 전쟁의 불씨가 되살아나고 있다. 이는 미야코 주민들이 조선인 ‘위안부’의 탄식을 간절한 평화의 노래로 다시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지난 7월, 오키나와의 재일조선인 김현옥씨가 별세했다. 그는 오키나와에 끌려갔던 ‘위안부’ 배봉기씨를 오랫동안 지원했던 인물이다. 조선인 ‘위안부’를 기억하던 미야코섬의 주민들도 고령에 하나둘 떠나고 있다. 그들이 바라던 평화는 더욱 요원해지는 시절이지만, 그럴수록 그들이 남긴 유산을 헤아려 본다. 숱한 사연을 담은 노래의 구전이 민중이 역사를 쓰는 형식의 하나라면, 아리랑은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평화의 주문이 아닐까. 그 마법의 주문을 외우면 거기에 깃든 마음들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아닐까.
최성용 사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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