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읽어도 책 든 모습은 멋져”…수백년 전 사람들도 똑같았다[인스피아]

김지원 기자 2024. 10. 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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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힙은 나쁜가? : 트렌드가 아니라 전통이다
장 바티스트 그뢰즈의 <자녀에게 성서를 읽어주는 아버지>(1755). ‘책을 읽어주는 사람(식자층)’과 그것을 ‘듣는 사람’ 간의 공동체적 연대와 신뢰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볼 수 있다. 루브르박물관
북카페·서재 등에서 ‘책 인증샷’ 유행…“겉멋만 부린다” 비판
17세기 이전 노동자 몇달치 임금 ‘귀한 몸’, 대부분 과시용
현재는 정보의 홍수 속 ‘거름망 역할’로 메시지 전달 도구
묘한 매력으로 생존해온 종이책, 어떻게 읽을지 고민할 때

최근 ‘텍스트힙(text hip)’ 유행이 크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텍스트힙이란 ‘글자(text)’와 ‘멋지다(hip)’를 결합한 단어로, 책과 독서를 통해 자신의 멋짐을 드러내려는 젊은 세대의 트렌드를 뜻하는데요.

멋진 북카페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리거나 마음에 든 책들을 구입해 인증샷을 찍는 것 등도 텍스트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해외에서도 올 초 ‘서재 인증’이 크게 유행했고, 틱톡에서 ‘눈물 챌린지’로 유명했던 <리틀 라이프> 등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역주행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죠.

이런 트렌드를 바라보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요. ‘어찌 됐든 간에 책을 만져보기라도 하니 다행이다’, 혹은 ‘정작 책은 안 읽으면서 겉멋을 부리는군’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반응들은 약간 핵심에서 벗어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텍스트힙의 핵심은, 멋진 ‘척’을 한다보다도 ‘책이 멋져 보인다. 왠지 모르겠지만, 나도 저기 어울려보고 싶다!’는 욕망 쪽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책을 정작 많이 읽진 않으면서도 막연하게 ‘멋져’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과연 오늘날에만 있는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오늘 편지에서는 책의 ‘옛날’을 살펴본 책들을 지팡이 삼아, ‘최신’ 텍스트힙 유행에 대해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백년 전에도…읽진 못해도 책은 멋져

‘요즘 사람들은 책을 참 안 읽는다…’ 한탄이 자주 들립니다. 실제로 올해 발표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인 60% 이상이 1년에 책을 단 한 권도 안 읽는다고 하기도 하고요.

이런 얘길 듣다보면, 마치 ‘좋았던 옛날’엔 사람들이 모두 진지한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열심히 읽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불과 1세기 전만 해도 우리나라 문맹률은 무려 80%에 달했고요, 17세기 이전엔 책 한 권이 노동자 몇달치 월급을 뛰어넘을 정도로 비쌌기 때문에 책을 ‘모셔두기’ 위해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죠.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책이 ‘진짜로 읽히기’ 시작한 건 역사상 정말로 얼마 안 된 일일지 모릅니다.

<옥스퍼드 책의 역사>는 기원전 3200년 무렵의 바빌로니아 석판부터 시작해 오늘날의 블로그까지 ‘책’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는 백과사전적 책인데요. 이 책을 읽는 내내 저는 ‘텍스트힙이 과연 오늘날만의 신기한 유행일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책은 꼭 ‘책을 읽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왠지 모르게 책의 불가사의한 매력에 끌리고, 책을 읽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을 읽어달라며 조르고, 쳐다보고, 읽진 않더라도 일단 예뻐서 집에 가져다두고 쓰다듬기도 했죠. ‘책꾸’(책 꾸미기)를 하기도 했고요.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한 권의 책을 갖기 위해선 반드시 누군가가 책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베껴써야 했습니다. 당연히 ‘책을 읽는 것’ 역시 전혀 일반적인 경험일 수는 없었겠고요. 책은 너무 귀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는 용도로 이용되거나(종교적), 읽는 도구라기보다는 소장용 수집품 같은 역할을 오래 해왔다고 하죠. 이는 인쇄술이 도입된 초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6~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대량 인쇄의 시대가 열리며 중산층 이하도 비교적 폭넓게 책을 구해볼 수 있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여전히 글을 능란하게 읽는 능력은 소수만이 가진 ‘특수한 능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글을 못 읽는’ 사람들은 ‘읽는 사람’들을 째려보고 잘난 척한다고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책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책이 좀 멋있다고 생각했고, 재미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책에 몹시 관심을 가졌습니다. 글을 읽지 못한다면, 대신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글에 귀를 기울였죠.

이들은 비록 글자를 술술 읽을 수는 없었지만, 대신 그림이 큼직하게 박힌 책들을 ‘보며’ 재미난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했고,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책을 듣고서 자신이 스스로 읽어보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죠. 저는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그야말로 수백년 전 버전의 텍스트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국 워릭셔 소재의 성베드로교회에 보관된 쇠사슬 책. 도서관에는 소수의 성직자 등만 출입이 가능했으며 책에 쇠사슬을 달아 책의 도난을 방지했다. Wikipedia

책은 알아서, 혼자, 잘 읽어라?

즉 ‘왠지 모르게’ 책이 재밌고 멋지다고 생각해서 어슬렁대지만 여전히 썩 잘 읽지 못하는 독자들은 수백년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텍스트힙은 최신 트렌드가 아니라 그야말로 수백년 된 ‘전통’이라고 할 만한 것인데요. 아마도 그 당시 사람들이 21세기에 온다면 멋진 도서전시회나 예쁜 책방을 우루루 몰려다니며 즐겁게 구경을 다닐 것이라고 생각했고요. 인증샷도 찍겠죠.

다만 제가 말하려는 건, 단순히 “텍스트힙 현상이 수백년 전부터 있었고, 진지한 독자는 원래부터 극소수였다. 그러니까 호들갑 떨지 마!”라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 제가 더 주목해보고 싶은 대목은, 과거엔 텍스트힙 독자들이 ‘그 이후’의 계단을 오르기가 비교적 수월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책 잘 읽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거나, 비슷한 사람들과 모여 함께 읽거나 하면서요.

우선, 과거엔 ‘책을 잘 읽는 덕후’들은 ‘책을 못 읽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해왔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무엇을 읽을지’ ‘무엇이 좋은 책인지’ 추천하는 다양한 글들을 통해섭니다.

독자님들 가운데서도 ‘책을 읽긴 읽어야 할 텐데, 대체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텐데요. 실은 ‘무엇을’ 읽을지 모른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독서에 있어서의 최대 진입 장벽입니다. 특히나 책이 너무너무 많아서 대체 뭐가 좋은 책인지 모르는 상황엔 더더욱요.

‘정보의 홍수’ 역시 비단 오늘날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무려 1525년에도 철학자 에라스뮈스는 “신간이 벌떼처럼” 찍혀나온다며 “이 홍수 속에서는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든 장점을 잃어버린다”고 불평했습니다. 이처럼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은 비단 책을 안 읽는 사람뿐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16세기 이후 ‘책에 대한 책’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독자의 관심사에 맞는 책을 얻기 쉽도록, 직접 누군가가 섬세하게 읽고 살펴보고 고른 책의 큐레이션, 서지 목록, 주제별 책, 도서관 카탈로그와 참고도서 목록 등이죠. “대체 뭘 읽지…” 하고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언제든 도움을 줄 수 있는 글들입니다. 직접 그 분야의 전문가, 아마추어들이 발로 뛰며 유익한 책에 대한 정보를 모았고요. 17세기 무렵부터 도서관들은 자체적인 장서 목록을 주제별로 분류한 카탈로그를 발행하기 시작했는데요. 저자는 “이 카탈로그는 독자가 예전에 미처 몰랐지만 관심이 있을 만한 책을 독자에게 안내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대목을 읽으며 오늘날 우리는 검색만 하면 ‘훨씬 더’ 쉽게 어떤 책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진심으로 어떤 안목 있는 사람이 직접 양서를 두루 읽어보고 사려 깊게 추천해주는 서비스, 글 등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초에 우리가 블로그에서 책을 검색했을 때 찾을 수 있는 내용은 대부분 쪽글, 광고, 체험단 서평이고요.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만 출간되는 신간은 총 6만2865종에 이릅니다.

광고만 찬란하고 내용은 꽝인 책 말고 진짜로 유익한 책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은 19~20세기 초 우리나라에도 존재했는데요. 독자들은 신문사, 도서잡지 등의 기자에게 질문을 보내 ‘한글로 된 추리소설’ ‘조선에서 구독할 수 있는 중학 강의’ ‘셰익스피어의 역사와 작품에 대해 알기 쉽게 쓰인 서적’ 등을 물었다고 합니다.

이어,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애초에 책을 각자 ‘혼자’ 읽어내는 것 자체가 굉장히 특이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특히나 이는 직업적 학자, 작가들과 달리 18세기 이후 책의 대량 생산 및 문해력 증가로 인해 탄생한 최초의 ‘대중 독자들’에겐 더 중요한 대목인데요. 유럽에서 책이 본격적으로 대량 생산되고 대중 독자들이 탄생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하게 독서회, 커피하우스, 상업도서관 모임 등 여럿이 모여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모임이 생겨난 시기와 일치합니다. 즉, 사람들은 대체로 혼자서 읽는 게 심심하고, 또 어렵기 때문에 모여서 함께 읽고 추천을 받기도 하고 또 떠들면서 생각을 키워갔던 것이죠.

이처럼 과거엔 ‘텍스트힙’으로 어설프게 어슬렁대며 시작하더라도, 금세 끌어올려줄 ‘책 생태계’의 동료와 선배, 길잡이들이 많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종이책은 왜 진작 안 망했나?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오늘날엔 책 안 읽는다는 꾸짖음만 잔뜩 있지, 진짜 일반 독자들의 책 읽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요즘 사람들이 책을 막연히 읽고 싶다고 할 때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장치는 얼마나 될까? 오히려 17~18세기에 비해 훨씬 적은 게 아닐까?…

한편으론, 왜 굳이 나는 ‘책’을 생각하는가라는 질문도 떠올랐습니다. 어차피 책은 그냥 역사 속으로 사라지던 차인데, 책에 굳이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도 책은 여전히 ‘제법 쓸모 있는’ 매체로서 고유한 역할을 독특하게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도 존재합니다. 꼭 ‘책만 짱이다!’라기보다는, 디지털 텍스트와의 상호보완적인 도구로서 말이죠.

알렉산드로 루도비코의 <포스트디지털 프린트-1894년 이후 출판의 변화>는 딱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대답을 저자 나름으로 궁리해가는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종이책은 왜 진작 안 망했나?”라는 질문에 대해섭니다. 이 책의 부제에 적힌 ‘1894년’은 최초로 책의 종말이 예견된 해인데요. 당시 전신 등의 발명으로 많은 사람들은 환호를 외쳤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무겁고 번거로운 종이책을 읽지 않아도 될 것이며, 사람들은 누구나 라디오로 요약된 소식, 글을 받아볼 것이라는 거였죠.

하지만 이런 희망찬 예언과는 달리 종이 인쇄물은 심지어 이후 TV와 인터넷, 스마트폰이 생기고 나서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찌 됐든 살아남아 있는 상탭니다. 저자는 한 권 분량으로 골똘히 궁리합니다. “그러게… 대체 왜 안망했지?”

물론 저자는 “책이 무조건 좋다”고만 하진 않습니다. 실제로 종이엔 명백한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 읽고 계시는 인스피아만 해도, 종이신문 버전에선 분량이 크게 줄었고 하이퍼링크들도 첨부할 수가 없죠.

하지만 저자는 오늘날이기 때문에 비로소 책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매력들이 있다고 하는데요. 저자가 소개한 ‘21세기 버전’ 종이책의 장점 중 한 가지, 유독 눈에 띄었던 건 ‘거름망으로서의 역할’이었습니다. ‘정보의 폭풍홍수’ 수준인 오늘날, 종이책은 그 까다로운 출판 과정 및 노동, 비용 때문에 오히려 정보 가운데 진짜 흥미롭고, 가치 있는 텍스트를 모아놓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책을 짧게 인용해보겠습니다. “인쇄는 점점 더 웹의 ‘정수’를 보존하기 위한 선택적 매체가 되고 있다. 인쇄물의 편집자는 큐레이터이자 인간 필터로 인터넷의 바다에 던지는 병 속의 메시지 중에 무엇을 안정적인 매체에 보관할지 결정하는 사람이 된다.” 이 밖에도 책을 읽는 동안엔 어떤 글의 내용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는 장점 등도 있고요.

여전히 종이책에 이러한 장점들이 있다면, 책은 디지털 네이티브들의 시대에도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을지도요. 누군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영감을 주는 재미나고 유익한 글(‘잼얘’)을 읽고 싶어 하는 건 어느 시대의 독자들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맺음말

과연 누군가 어떤 장래희망이나 본격적인 취미를 가질 때 처음부터 진지한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대체로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땐 ‘왠지 좀 멋져…’에서 출발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저만 해도 고등학교 땐 철학책을 ‘읽고 싶어서’ 난해한 베개용 철학책을 뽐내며 들고 다녔고요.

결국, 가장 중요한 건 현재의 ‘멋진 척’보다도 - 오늘의 ‘멋져’가 이후 그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지가 아닐까요?

100년 전부터 사람들은 펄쩍 뛰며 ‘책은 곧 망할 거야!’라고 해왔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젊은이들로부터 왠지 좀 멋있어 보이네…라는 마음을 끌어내는 건 역시 책이 가진 묘한 매력이자 끈질긴 생명력에서 기인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어떤 분야에서든 그 ‘왠지 좀 멋있어 보이네’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오늘날에도 그런 묘한 매력이 책에 남아 있다면, 아직은 책을 가지고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함부로 까불고 놀아볼까 조금 더 고민해볼 가치가 있겠죠. 어슬렁대는 사람들을 돕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함께요.



이 글은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에 실린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더 많은 글을 보고 싶으시다면 오른쪽 QR코드를 촬영하거나, 포털에 ‘인스피아’를 검색해서 구독해주세요.

김지원 기자 deepdeep@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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