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도 칼럼] 부산국제영화제는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아시아와 문화의 힘 바탕, 성찰 통해 앞으로 나가라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BIFF) 집행위원장의 영화 인생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청년, 동호’(감독 김량·국제신문 존필름 제작)가 6일 BIFF 관객과 만났다. 지난 5월 칸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면서 세계 최초로 상영된 이후 올해 BIFF 특별 초청으로 아시아에서 처음 공개됐다. ‘열정적인 어른, 영원한 청년’이란 메시지가 선명하다.
‘관객과의 대화’에선 다큐멘터리의 감동이 고스란히 이어졌다. 박도신 BIFF 집행위원장 직무대행이 사회를 자청했고, 김 위원장과 김 감독이 감회를 털어놨다. “BIFF에서 데뷔한 감독으로서 큰 감동입니다.”(김량 감독) “제가 기획한 영화의전당 무대에 (제 이야기 덕분에) 설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습니다.”(김동호 전 위원장)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영화제는 극장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영화를 볼 기회입니다. 새로운 영화 체험은 관객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김 전 위원장) “BIFF 에너지가 굉장하듯이 BIFF에 참여하는 관객 에너지도 폭발적입니다.”(김 감독)
BIFF 산파 역할을 하고 BIFF 선장 격인 집행위원장을 15년 동안 맡은 김 전 위원장은 BIFF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영화계의 ‘아버지’다. 그를 다룬 ‘영화 청년, 동호’가 주목받는 이유다. 김 감독은 한국 영화의 세계화를 일군 그의 발자취를 차근차근 짚었다. 이는 내년이면 30회를 맞는 BIFF가 지켜나가야 할 정체성이자 찾아야 할 미래 비전의 실마리이기도 하다. BIFF는 단순한 영화 행사가 아니라 부산을 담고 이 시대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올해 BIFF가 내건 ‘아시아의 시선, 영화의 바다’란 깃발에도 이런 고민이 담겼다. 아시아인의 삶이 녹아 있는 영화, 그 영화에 담긴 에너지, 그 에너지가 창출하는 새로운 문화…. BIFF는 지금 환골탈태의 시험대에 섰다. 조직 내홍을 극복해야 하고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김 전 위원장에게 BIFF 산파역을 권했던 ‘젊은 피’ 김지석 전 부집행위원장이 BIFF 20주년을 결산하며 던진 화두 ‘테세우스의 배’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는 어떻게 정체성을 유지하며 새 피를 수혈하느냐 하는 문제다.
올해 개막작 ‘전,란’(감독 김상만)을 두고 정체성 논란이 한창이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이 사극은 넷플릭스 영화다. BIFF가 처음으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콘텐츠를 개막작으로 선정하자 대중성을 좇아간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를 두고 박도신 직무대행은 ‘좋은 영화라면 플랫폼에 상관없이 소개하는 것이 영화제의 의무’라고 해명했다. 한국 영화의 생존과 OTT로 대표되는 새로운 환경 적응은 피할 수 없는 과제임이 분명하다.
지난 2일 영화의전당 야외극장에서 본 ‘전,란’은 강동원 박정민 차승원 김신록 진선규 정성일 등 호화 배역의 연기와 임란 극복에 떨쳐 있어난 백성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극을 이끌어가는 대립 축은 설득력이 있었다. ‘개는 기르는 것이고 종은 부리는 것’이라는 시대적 한계와 ‘임금과 백성이 다를 바가 없다’는 ‘대동’과 ‘범동’ 정신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인물만큼이나 이름없이 죽어간 백성의 항쟁사도 의미가 있다. 이런 다원적인 시각은 BIFF의 정체성과 비전에도 필요하다.
최근 부산현대미술관에서 부산비엔날레 전시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색다른 경험을 했다. 부산현대미술관 소장품을 상설 전시하는 지하 1층 ‘소장품섬’에서 백현주 작가의 영상 작품 ‘친절한 영자씨’를 보고 허영란 울산대 교수의 ‘복수(複數)의 시나리오, 기억과 메타기억’ 강연을 들었다. ‘친절한 영자씨’는 백 작가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를 촬영한 부산 주례여고 인근 주민들을 2년가량 인터뷰하며 그 내용으로 만든 12분44초 분량 영상 작품이다. 박 감독은 ‘전,란’의 제작자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선 금자가 사는 집으로 가는 골목이자 금자가 총으로 납치범을 쏘는 장면이 나오는 골목이지만, ‘친절한 영자씨’에서는 놀랍게도 영자씨가 장금이로 변하고 눈 내리는 골목에선 소금을 뿌리는 주민들이 등장한다. ‘친절한 금자씨’ 촬영 모습을 지켜본 주민들의 기억이 저마다 달랐다. 여기엔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입장에서 해석해 본질을 다르게 인식하는 ‘라쇼몽(羅生門) 효과’가 깔렸다. 허 교수는 “기억은 변하고, 재구성되며, 현재에 대한 입장에 따라 재해석된다”고 강조했다.
지난 2일 박형준 부산시장과 박광수 BIFF 이사장이 개막 선언을 할 때, 박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배우가 무대에서 관객을 웃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웃는 것이죠.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웃으며 ‘영화의 바다’ 막을 올렸다. 어깨에 힘을 빼고 새로운 30년을 준비하자. 스마트하고, 심플하며, 스피디하게. 과거에 머물지 말고 성찰을 거쳐 앞으로 나아가자. ‘영화 청년, 동호’가 던지는 숙제이다.
정상도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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