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에서 찾아낸 유물이야기] <119> 나전 와당문 사각 접시(螺鈿 瓦當文 四角 楪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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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제작된 다섯 점 일괄 구성의 흑칠 나무 접시(사진)이다.
각 접시 안쪽에는 당초문(唐草文) 암막새와 수자문(壽字文) 수막새 문양을 나란히 나전(螺鈿)했고, 테두리에도 띠를 둘러 나전했다.
특히 조선의 전통 문양이 나전 된 제품은 백화점, 호텔, 기념품 전문상점 등에서 유통되었다.
이후 1900년대부터 아파트 주거 문화로 생활양식이 변화하면서 자연스레 나전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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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제작된 다섯 점 일괄 구성의 흑칠 나무 접시(사진)이다. 각 접시 안쪽에는 당초문(唐草文) 암막새와 수자문(壽字文) 수막새 문양을 나란히 나전(螺鈿)했고, 테두리에도 띠를 둘러 나전했다. 접시의 평균 크기는 14㎝×10.4㎝×1.4㎝이다. 나무로 된 보관 상자에는 ‘海(해), 朝鮮特産(조선특산) 螺鈿漆器(나전칠기)’라는 상품명이 적힌 종이가 부착되어 있다.
우리말로 자개라 불리는 ‘나(螺)’는 나선형의 껍데기를 가진 조개류를, ‘전(鈿)’은 금 은 동의 금속판을 물건 표면에 새겨 넣어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나전(螺鈿)이란 조개껍데기를 얇게 갈아내고 이를 무늬로 만들어 기물의 표면에 박아 넣어 꾸미는 공예 기법 혹은 그 완성품을 말한다.
우리의 나전칠기는 삼국시대에 이미 제작되었다. 통일신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국보 ‘나전 화문 동경(螺鈿花文銅鏡)’이 이 시기의 대표적 작품이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불교 귀족문화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기술과 아름다움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조선의 나전칠기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고려 나전의 화려함과 정교함은 사라지고 회화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으로 변모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나전칠 공예는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 근대기 산업화와 함께 그동안 장인에 의해 도제식으로 전수되던 나전칠 공예의 체계와 기술은 ‘도안’과 ‘제작’ 부분으로 분리 개편돼 근대적 틀을 갖추었고, 기존과 다른 제작 기술로 좀 더 세련된 나전기법을 보여 주었다. 옻 명산지인 태천과 자개 명산지인 통영에 공업전습소를 설치해 기술을 양성하는 교육체계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전통의 맥은 많은 부분 왜곡을 피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나전칠기는 특산품이자 기념품이었다. 특히 조선의 전통 문양이 나전 된 제품은 백화점, 호텔, 기념품 전문상점 등에서 유통되었다. 당시 경성부 본정에 위치한 해시상회(海市商會)는 조선 특산품을 유통하던 꽤 이름난 상점으로 짐작된다. 해당 유물의 포장 상자에서 확인되는 ‘海(해)’는 판매 회사인 해시상회 취급 상품임을 말한다.
해방 이후 나전칠기 시장은 나전의 전통을 복원하고 계승하기 위해 지역별로 견습소와 양성소가 설립되었으나 수공업이라는 한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1900년대부터 아파트 주거 문화로 생활양식이 변화하면서 자연스레 나전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었다.
우리의 나전칠기는 장구한 시간의 경과에도 전통이 끊긴 적이 없고, 시대가 바뀔 때마다 그 외형을 바꿔가며 시대를 증언해 온 소중한 무형 문화유산이자 유형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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