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와 짧은 동행 뒤 결별…인권 문제 인식이 달랐다
학자·법률가·학생운동가 대거 참여
학생·노동단체 중심 운동저변 넓혀
인권운동사랑방, 한때 참여연대 합류
이주노동자 농성장소 제공 견해차
“장소 내줘야” vs “현안해결 단체 아냐”
감수성 불일치에 ‘회의감’…독립 나서
갈월동 시대 개막…“홀가분한 마음”
철로 탓에 진동 심한 사무실 환경
참여연대와 비판과 연대의 관계로
[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22화 참여연대와 갈라서다
놓치고 지나친 얘기가 있다. 인권운동사랑방에 정식으로 합류하기 전에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다. 1994년 6월16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조선노동당 지하당 ‘구국전위’” 사건을 발표했다. 남민전 사건으로 복역을 했던 전력이 있는 안재구씨가 총책이고, 10명을 함께 구속했다는 내용이었다. 구속자 중에는 ‘박래군’(朴來君, 내 이름의 군은 무리군(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고향은 나와 같이 ‘경기도 화성군’(지금은 시로 승격)이었고, 나이도 나와 같았다. 그런데 그는 고려대 출신이었다. 분명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고문피해자 모임 관련한 일로 인권운동사랑방을 이용했던지라 인권운동사랑방에 확인 전화가 쇄도했다. 언론사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부모님들을 비롯한 지인들의 확인전화로 사무실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사람들 생각으로는 박래군이라는 이름이 흔치 않았고, 경기도 화성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내가 분명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언론 보도가 나가자 시골집에서도 난리가 났다.
“이놈이 이제 하다 하다가 간첩이 되었다.”
아버지가 하셨다는 말씀이다. 사무실로 전화가 왔는데, 아니라고 얘기를 해도 거짓말이라고 믿지를 않으셨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직접 전화를 해서 확인을 시킨 다음에야 안심하셨다. 평생 자식 걱정을 하신 부모님에게 의도치 않게 다시 한번 걱정을 끼쳤다.
사건 관련자 박래군은 이후 석방된 다음에 정관계에도 관여했다. 그가 어느 직책을 맡게 되었다고 보도가 나갈 때마다 이런 혼선은 거듭되었다. 나는 그 다른 박래군과 2021년께야 처음 만나서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참여연대 합류한 인권운동사랑방
그런 소동을 거치면서 1994년 8월1일 자로 정식으로 인권운동사랑방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에 새로 만들어지던 참여연대는 그냥 하나의 단체가 새로 만들어진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조희연(전 서울시교육감) 등의 진보적 학자들, 박원순 등의 인권 변호사 그룹, 김기식 등의 학생 운동 출신 등”이 함께 만든 조직이었다. 참여연대의 창립선언문은 이 새로운 단체가 어떤 지향을 갖고 시작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참된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행동은 사회와 정치무대의 한복판에서, 그리고 국민의 일상생활 과정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민주주의란 문자 그대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주인이 머슴처럼 취급받고 국민의 공복에 불과한 사람들이 주인 위에 군림하는 시대착오적인 현상이 만연해 왔습니다. 누가 권력을 잡든 이러한 본말전도적 현상을 스스로 개선하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국민 스스로의 참여와 감시가 필요합니다. 몇년에 한번씩 투표를 함으로써 나라의 주인의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실상부한 나라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국가권력이 발동되는 과정을 엄정히 감시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창립선언문에서 밝힌 것처럼 변화된 시대, 새로운 민주주의를 열어갈 비전을 내세우며 참여연대는 출발했다. 1987년 한국여성단체연합, 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93년 환경운동연합에 이어서 참여연대가 창립되면서 시민사회운동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전까지 학생단체, 노동단체, 민중단체 중심의 운동이 훨씬 더 넓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90년대는 이렇게 새로운 시민사회가 형성되던 시절이었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은 참여연대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많은 얘기를 나눴다. 일단 권력감시운동과 같은 새로운 시민과 함께하는 운동에 대한 기대와 긍정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권운동사랑방과 같은 작은 단위로는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여론지형을 움직일 수 있는 전문성과 영향력을 기대했다고나 할까. 이대훈과 같은 천주교 국제연대 그룹이 보다 적극적이었다.
아주 짧았던 참여연대와의 동행
참여연대의 처음 사무실은 인권운동사랑방이 세 들어 있던 용산역 건너편 기원빌딩 3층이었다. 건물 한층을 전부 빌려서 사무실로 쓰는 것부터가 달랐다. 상근자도 처음부터 10명이 넘었다. 그런데 막상 합류해서 함께 활동하다 보니 여러 문제가 생겼다. 일단 의사결정체계가 복잡해졌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인권 현안이 생기면 활동가들이 언제고 모여서 토론을 벌이고, 사업을 해 나가면 되는 구조였다. 하지만, 참여연대는 사무처장에 보고하고, 집행위원회에도 보고하고, 그래서 결정을 하는 과정이었다.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인권 문제에 대한 인식도 달랐다. 한 예로 창립한 그해 겨울에 이주노동자들이 참여연대 사무실로 농성을 들어오고 싶어 했다. 참여연대는 창립하자마자 언론이 주목하는 단체였고, 그에 따라서 이주노동자들이 농성을 하면 언론의 주목도 받고, 참여연대의 힘도 빌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그런 요청이 들어왔을 것이었다.
‘참여연대 인권센터’인 인권운동사랑방 사람들은 그런 요청이 들어오면 당연히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참여연대 사무처의 생각은 달랐다.
“이주노동자들이 여기 들어와서 농성을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농성을 하겠다고 하면 그때마다 내주어야 하지 않냐.”
참여연대가 지향하는 길은 전문성을 가진 시민단체이지, 현장 현안을 해결하는 단체는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들은 1995년 1월에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로는 참여연대라는 안정적인 실내 공간에서 농성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감수성의 차이와 운동 방향에 대한 불일치 등이 확인되는 과정 중의 하나였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을 여러번 겪으면서 참여연대와 계속 같이 가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가 일었다. ‘결혼하자마자 이혼이냐’는 얘기도 나왔다. 1995년 1월 최종적으로 참여연대에서 독립하기로 결정을 하고, 새 사무실을 찾아 나섰다. 서울역과 숙대입구역 중간에 있는 갈월동의 사무실을 찾았다.
갈월동 사무실 시대
참여연대와 결별을 하고 새로운 사무실로 나오면서 나는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인권 현장을 외면하고 무슨 인권운동을 하냐’는 그런 생각과 함께 윗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리가 논의하고 결정하는 그런 운동을 그렸던 것 같다. 건물 3층에 사무실을 잡고, 페인트칠과 서가 등 집기를 배치했다. 집기들은 주로 변호사 사무실들에 연락해서 남는 책상과 책장들을 날라 왔다. 한겨울에 이사 준비를 하는 일이 힘들었지만, 즐거운 마음이었다. ‘우리 사무실’이 생기는 것이니까 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 사무실은 근무환경이 나빴다. 건물 뒤로는 경부선 철로가 있었다. 수시로 열차가 지나가고 1호선 전철이 지나갔다. 앞은 한강대로였다. 대로 아래로는 4호선 전철이 지나갔다. 전철이 지나갈 때마다 미세한 진동이 있었다. 심할 때는 정수기 통의 물이 흔들리는 게 눈으로 확인될 정도였다.
갈월동 시대는 지금까지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사무실에 얹혀살던 상황이 역전되는 결과를 낳았다. 매일 상근하는 활동가들이 북적대는 사무실 한편에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사무실이 붙어 있는 꼴이었다. 갈월동 사무실로 이전할 때는 국제연대를 맡았던 이들을 중심으로 참여연대에 남았다. 그럼에도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7명 정도가 함께 하는 단체였다. 인권단체로는 작은 단체가 아니었다. 갈월동 사무실로 이사하고 개소식을 하는 날에는 참여연대 식구들도 와서 축하해주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이후 참여연대가 추진한 ‘작은 권리 찾기 운동, 소액주주운동’에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도 큰 방향에서는 30년 동안 많은 일에 연대해가는 관계로 유지되고 있다.
새 사무실로 이전하는 과정이었던 1995년 1월, 나는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새로운 일을 맡게 되었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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