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작가 남궁산 “작가의 사람됨·예술관, 장식적 그림에 함축했죠”

최재봉 기자 2024. 10. 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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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이달 27일까지 창비부산서 ‘장서표전’ 열어
창비부산에서 열리고 있는 남궁산 장서표전에 나온 문인들의 장서표.

“장서표는 원래는 귀한 책을 소유한 이가 책에 대한 소유권과 애정을 남기기 위한 표시로 시작됐습니다. 서양에서는 책에 붙이는 장서표 형태였고 동양은 도장처럼 책에 찍는 장서인 방식으로 출발했죠. 단순히 표식에 그치지 않고 문자와 그림을 결합하면서 예술성과 실용적 목적을 아울러 지닌 판화 예술의 한 장르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생명판화’와 ‘장서표’라는 독자적인 분야를 개척해 온 판화가 남궁산 작가가 부산에서 장서표전을 열고 있다. 지난달 24일 부산역 앞 문화 공간 ‘창비부산’에서 개막해 이달 27일까지 이어지는 ‘우리 시대 작가들의 장서표’ 전이 그것이다. 부산의 서형오 시인과 동아대 교수인 소설가 함정임, 부산 출신 소설가 정길연을 비롯해 신경림, 김훈, 정호승, 안도현 등 문인들 40명의 장서표가 나와 있다. 지난해 6~7월 부산 민주공원 기획전시실에서 6월 민주항쟁 36주년 기념 ‘민중미술가 열전’ 초대전에 참여한 데 이어 다시 부산에서 전시회를 연 남궁산 작가를 6일 오후 전시장에서 만났다.

책 소유자의 그림 도장인 장서표
예술·실용성 지닌 판화예술 한 장르
30년 동안 300~400점 작업하고
국내 첫 전시 등 독자 분야로 개척

“작년 전시는 민중미술 시절의 제 초기 작품들을 중심으로 생명판화 연작과 장서표를 일부 더한 것이었습니다. 규모도 크고 좋은 취지의 전시였지만 장소가 외져서인지 기대만큼 많은 호응을 얻지는 못했어요. 이번 전시 장소인 창비부산은 접근성이 좋은 데다 부산의 문화예술 명소로 알려진 공간이어서인지 많은 분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남궁산 작가가 장서표라는 장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91년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첫 개인전을 했을 때였다. 당시 한겨레신문에 전시회 기사가 실렸는데, 기사와 함께 신문에 소개된 작품 ‘봄처녀’를 인상 깊게 본 조선족 판화가 이수산 선생이 전시장을 찾아와 인사를 나누었고, 그로부터 중국의 장서표 작품들을 소개받았다. 평소 책에도 관심이 컸던 그는 일본의 장서표 동호회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의 장서표를 들여오고 한국의 동료 판화가들에게 장서표 작업을 하도록 독려해서는 1993년에 ‘세계의 장서표전’이라는 국내 첫 장서표전을 열었다. 1995년 인사동 현화랑에서 첫 장서표 개인전을 한 것을 비롯해 2010년에는 대전대학교에서 그 학교 교수와 교직원들의 장서표만으로 ‘대전대 사람들’이라는 전시회를 했고, 2012년에는 전북작가회의 회원들의 장서표를 가지고 ‘전북 사람들’이라는 전시를 마련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300~400점 정도의 장서표 작업을 했고, 장서표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글을 묶은 단행본 ‘인연을 새기다’를 펴내기도 했다.

창비부산에서 열리고 있는 남궁산 장서표전에 나온 문인들의 장서표.

남궁산의 장서표는 그 주인인 ‘표주’의 사람됨과 그의 세계관 및 예술관을 장식적이면서도 함축적인 그림에 담는 것이 특징이다. 이번 전시에도 나온 김훈 작가의 장서표에는 그의 발이 되어 전국 각지를 동행했던 자전거가 들어가 있고, 소설가 이순원의 장서표에는 그의 대표작 무대인 은비령을 새겨 넣었다. 작고한 번역가 겸 소설가 이윤기는 반인반수의 켄타우로스족 현자 이미지로 장서표에 남았고, 서형오 시인은 지인들이 그를 부르는 별명대로 흑곰이 시집으로 이루어진 나무 위에서 하늘에 대고 펜으로 시를 쓰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남궁산 판화가가 작업한 정호승 시인의 장서표와 그에 대한 설명이 창비부산 전시실 벽에 걸려 있다

자전거 넣은 김훈 장서표 등
문인 40명 장서표 27일까지 전시
“디지털과 결합하면 응용·확산 무궁”

“얼마 전에 돌아가신 신경림 시인은 1980~90년대에 민요연구회 활동을 같이하며 아버지처럼 모시던 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해 주신 말씀 중에 ‘사람은 더불어 혼자 산다’는 게 있어요. 그 말씀이 인상 깊어서 선생님께 헌정한 장서표에는 더불어 홀로 길을 가다 망중한에 있는 새 한 마리를 그려 넣었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사막을 통과해야 한다. 그 사막에 낙타가 없다면 얼마나 황폐할까’라는 말씀을 해 주셔서 장서표에 낙타를 새겨 넣었죠.”

최근의 장서표 표주들 사이에서는 장서표 작품을 스탬프로 변용한 일종의 현대판 장서인이 인기를 끌고 있다. 소설가 김연수는 마지막까지 서재에 남기고 싶은 책 365권을 추려서 일일이 장서표 스탬프를 찍고 있고, 소설가 장강명은 독자 대상 사인회에서 자신의 책에 서명과 함께 장서표 스탬프를 찍어 주고 있다.

남궁산 판화가가 6일 오후 자신의 장서표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창비부산 전시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과 달리 책이 더 이상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일종의 소모품처럼 여겨지다 보니 서양에서도 이제는 거의 장서표를 쓰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장서표는 자기를 상징하는 ‘그림 도장’ 역할을 할 수 있고 요즘 상황에서는 디지털과 결합해 응용·확산할 가능성도 무궁해요. 판화 미술의 정신처럼 대중성을 지닌 장서표가 일종의 레트로 바람을 타고 다시 유행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봅니다. 저 역시 이제는 번듯한 전시장만 고집하지 않고 도서관이나 북카페, 문학관, 서점 등 크기와 성격을 가리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전시에 임할 생각이에요.”

5일 오후 전시장에서는 ‘책, 판화 그리고 장서표 이야기’를 주제로 한 작가의 강연이 열렸고, 16일 오후 2시에는 전시장 인근 성전초등학교에서 교사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장서표를 직접 만들어 보는 체험 행사도 열린다.

창비부산 전시장에서 장서표 전시회를 열고 있는 판화가 남궁산(왼쪽)이 안도현 시인과 만나 안도현 시인의 장서표(사진 가운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87년 판화가로 데뷔한 이래 장서표전을 비롯해 30여 차례 개인전과 100회가 훌쩍 넘는 단체전에 참여해 온 남궁산 작가는 최근에는 판화 작업보다는 저술 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색의 역사를 다룬 청소년 교양서 ‘문명을 담은 팔레트’를 2017년에 출간해 1만1천여 부가 팔리는 등 좋은 반응을 얻었고, 지금도 책과 출판 및 판화의 역사를 다룬 책과 미술 및 역사 관련 교양서 등을 준비하고 있다.

“판화와 출판은 출발부터 남이 아니었어요. 저 역시 판화가의 정체성과 글 쓰는 일 사이에 괴리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장서표를 비롯한 판화 작업을 꾸준히 하면서 동시에 제가 흥미를 느끼는 책과 역사 등에 관한 글을 쓰는 일 역시 계속할 생각입니다.”

부산/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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