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일본의 사과 못 받고…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 별세[플랫]

플랫팀 기자 2024. 10. 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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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 95세로 별세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인 김성주 할머니가 별세했다. 향년 95세. “평생 가슴 펴고 큰길 한번 걷지 못했다”는 할머니의 생전 마지막 소원은 ‘일본의 사죄’였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일제강점기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강제동원됐던 김 할머니가 지난 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6일 밝혔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김성주 할머니가 지난해 3월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일본 전범 기업의 참여와 배상이 빠진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안에 대한 기자 간담회를 열고 있다. 문재원 기자

전남 순천이 고향인 김 할머니는 순천남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44년 5월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해서 중학교도 갈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일본으로 향했다. 겨우 만 14세였다.

할머니가 도착한 곳은 비행기를 만드는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굶주림 속에 임금 한 푼 받지 못하고 고된 노동을 강요받았다. 철판을 자르는 일을 하다 왼쪽 집게손가락이 잘리는 상처도 입었다.

1944년 12월7일 발생한 일본 도난카이(東南海) 지진 때에는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무너진 건물더미에 깔려 발목을 크게 다쳤다. 할머니는 생전 “지진 때 다친 이후로 발목이 쉽게 접질려 굽이 조금이라도 있는 신발은 아예 신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성주 할머니가 1944년 6월경 나고야에 도착해 본격적인 노동에 들어가기 전 순천에서 동원된 동료들과 함께 나고야성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해방 후 구사일생으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정신대’라고 하면 모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잘못 알고 있을 때였다. 할머니는 “내 평생 가슴 펴고 큰길 한번 다녀보지 못하고, 뒷질(뒷길)로만 뒷질로만 살아왔다”고 말했다.

뒤늦게 용기를 낸 할머니는 2012년 10월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18년 11월29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판결을 받아냈다. 확정판결 이후에도 미쓰비시 측이 배상을 거부하자 김 할머니의 법률 대리인들은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특허권 2건을 압류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 법률 대리인단이 지난해 3월 13일 서울 종로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앞에서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 제3자 변제안 거부 문서를 손에 들고 있다. 한수빈 기자

정부는 2023년 3월 기업들의 기부금으로 김 할머니 등의 배상금을 대신 지급하는 ‘제3자 변제방안’을 발표했다. 김 할머니는 변제안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끌고 갔는데, 어디에다가 사죄를 받고, 어디에다가 (사죄)요구를 하겠느냐”며 반대했다. 결국 지난해 5월 일본 기업 대신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대신 지급하는 ‘판결금’을 수용했다.

유족으로는 2남2녀가 있다. 빈소는 경기 안양시 안양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7일 오후 1시다.

할머니의 동생인 김정주 할머니도 1945년 2월 일본 도야마에 있는 후지코시 공장으로 강제동원됐다. 김정주 할머니는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올해 1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고, 배상 이행을 기다리고 있다.

▼ 강현석 기자 kaja@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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