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오비추어리’…짧게 살고 오래 죽는다[창간기획]

유정인 기자 2024. 10. 7.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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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창간 78주년 기획
‘쓰레기 오비추어리’ 총 5회 시리즈
7~12일 ‘(재)지구와사람’에서 관련 전시
지난달 4일 경기 파주시 한 중고의류 수출업체에 산처럼 쌓인 헌 옷 더미 앞에 아동 원피스의 영정이 놓여 있다. 중국에서 배송돼 한국에서 한 번 입힌 뒤 버려진 이 옷은 수출업체 창고에 머물다 조만간 해외로 나간다. 한수빈 기자

■프롤로그

지난달 11일 새벽 인천항을 떠난 폴레간드로스호에는 중고의류로 가득 찬 컨테이너가 실렸다. 다음달 말 도착할 최종 목적지는 나이지리아 오네항이다.

한국에서 버려진 옷들이지만 ‘한국 옷’이라고 부르긴 어렵다. 타국 원료로 중국, 캄보디아 등에서 제작된 뒤 한국 소비자를 거쳐 아프리카 대륙에서 최종 폐기될 물건들이다.

버려진 의류의 대이동은 매일 지구 전역에서 일어난다. 공산품 생산·소비·폐기 과정에 여러 국가가 얽히면서, 누구도 소유했다가 폐기한 물건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의류 대이동은 개별 국가, 산업의 탄소 발생 책임을 손쉽게 지우는 구조를 갖췄다.

경향신문은 소비자에게 닿기 전부터 ‘헌 의류’로 한국을 떠나기까지, 버려진 것들의 이야기를 추적했다. 줄무늬 치마, 유아 원피스 등 구체적 물건들의 생애사에는 원료와 제품의 국제적 이동, 쉽고 빨라진 소비와 폐기, 버려진 이후 다시 시작되는 긴 여정 등이 녹아 있다. 따로 인식되던 개별적 순간들을 하나로 이으면 헌 옷 대이동에 개입한 모두의 연결성이 드러난다.

유달리 빨라진 생산·소비·폐기의 속도는 대이동 규모를 키운다. 해외 전자상거래 플랫폼 등으로 초저가 물품을 구매하기 쉬워지면서 일단 많이 산 뒤 단기간에 폐기물로 내놓는 새로운 소비 패턴이 나타났다. 일부는 태그도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배송 직후 버려진다. 기획팀은 이런 소비와 폐기 형태를 ‘딜리버-스루’(Deliver-through·배송 즉시 버림), ‘패스트래시’(Fast+trash·실시간으로 버려지는 쓰레기)라는 새로운 용어에 담기로 했다.

산업 대응은 곧잘 제도를 앞서간다. 의류업체에서 얼마나 많은 양의 폐섬유가 소각 처리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이 중 일부는 소비자에게 닿은 적 없는 재고들이다. 유럽연합(EU)은 지난 7월 의류 재고 소각을 금지하는 제도를 도입했지만, 한국은 재고 소각량조차 제대로 집계되지 않는다. 비공식 경로로, 불투명한 규모로 소각되는 경우도 많다고 관련 업계는 말한다.

모든 사물은 흔적을 남긴다. 인류가 만들어 소비한 뒤 폐기하는 물건들은 인류가 지구에 새겨넣는 상흔들이다. 누군가의 물건으로 며칠을 살고, 지구를 돌며 오랜 시간에 걸쳐 죽는 물건들과 인간들의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조명한다.

서울 용산구 (재)지구와사람 갤러리홀에서 7~12일 경향신문 창간 78주년 기념 ‘쓰레기 오비추어리’ 전시가 열린다. 정지윤 선임기자
세 점의 대형 골판지에 줄무늬 치마와 운동복, 아기 원피스·모자·구두 세트 사진이 흑백으로 큼직하게 찍혔다. 색채 없는 골판지 평면엔 이동 경로를 적은 글 따위가 가득하다. 부고 기사 대상을 사람에서 물건으로 바꾼 ‘버려진 물건들의 오비추어리’ 작품들이다.
경향신문이 창간 78주년을 맞아 버려진 물건들의 이야기를 담은 ‘쓰레기 오비추어리’ 전시를 7일 시작했다. 동명의 창간기획 시리즈 연계 전시다. 2개 전시관에 창간기획팀이 직접 제작한 14점의 작품을 배치했다. 오비추어리관의 세 작품에는 지난달 중고의류 수출업체 컨베이어 벨트에 놓였던 물건들 궤적을 담았다. 방 중앙에는 커다란 수출용 옷더미(베일)를 덩그러니 놓았다. 베일 주변으로 주요 생산·소비·수출·폐기 지역의 위도와 경도를 표기해 복잡하게 얽힌 지구적 연결성을 강조했다.
다른 전시관에선 폐기된 옷들 조각, 폐CD 등 다양한 재료로 제작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캔버스에 붉은색 계열 옷 조각들을 붙인 작품에는 ‘소각장’이라는 제목을 달았다.2분가량 ‘영상통화 팬사인회’에 응모하려고 한 팬이 사들인 뒤 버린 80장의 CD는 층층이 쌓아 올렸다. 불법 폐기물 포대의 끈들이 나풀거리는 ‘어떤 춤’ 등 사진 5점과 관람자가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콘텐츠, 영상 등도 마련됐다.
전시 폐기물을 최소화하려 액자 사용을 자제하고 골판지를 활용했다. 작품 캡션은 아크릴 대신 종이에 찍고 폐폼보드를 재활용했다. 작품 재료들은 전시 뒤 환경 부담을 줄이는 방식으로 배출한다.
창간기획팀은 “처음과 끝을 동시에 인지할 때 연결과 순환의 감각이 열릴 수 있다고 믿으며 전시를 준비했다”며 “물건들의 전 생애가 건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7~12일, (재)지구와사람 갤러리홀(서울 용산구 회나무로 66)
후원: (재)지구와사람
※ QR코드가 ‘모바일 전시도록’으로 연결됩니다.

■관련 전시(10월 7~12일)


☞ 쓰레기 오비추어리
     https://www.khan.co.kr/kh_storytelling/2024/trashObituary/

■인터렉티브

인터랙티브 ‘나 의(衣) 생’

☞ 나 의(衣) 생
     https://www.khan.co.kr/kh_storytelling/2024/trashObituary/trashClothes/index.html

창간기획팀
유정인(정치부) 고희진(전국사회부) 이홍근(정책사회부) 최혜린(국제부) 정지윤·한수빈(사진부) 박채움(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

■연관기사


☞ [창간기획] 나이지리아로 간 ‘7번’ 유니폼, 옷의 죽음을 따라가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410070600111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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