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한국이 싫어서
얼마 전, 기후위기 시대를 맞닥뜨리며 삶을 생태적으로 전환하기 위해 대도시에서 농촌지역으로 삶터를 옮겨 생활하는 청년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은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기후와 수도권을 위해 다른 지역민들의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것을 왕왕 목격하고 걱정과 분노를 쏟아냈다. 최근 이들은 막 자리 잡아 살기 시작한 농촌지역에 초고압 송전탑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국전력이 전북 부안과 고창, 전남 신안 등의 해상풍력발전단지에서 생산된 소위 ‘친환경 재생에너지’를 삼성과 SK하이닉스 등 반도체기업이 들어설 용인 반도체 산업단지에 전송하기 위해 초고압 송전탑 250개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송전탑들은 전북 무주, 진안, 장수와 충북 영동, 충남 금산, 그리고 경남 거창과 함양에 들어선다는데 해당 지역 주민들도 모르게 결정된 일이었다. 한전이 이런 식으로 일을 추진하는 데엔 1978년 박정희 정권하에서 입법된 ‘전원개발촉진법’이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전기사업 명목으로 지도면에 마음대로 선을 긋고 일을 추진해 생태계와 지역 주민들의 삶터가 파괴되고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들이 이런저런 질병에 걸려 죽어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악법이다.
이런 식으로 전송된 전기가 도착해 쓰이게 될 반도체 산업이란 것도 생명이 온전히 잘 살기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역시 문제적이다. 반도체 산업 자체가 이미 온실가스 배출량의 5%를 차지할 만큼 전력 소비를 많이 하는 데다 물 부족 국가로 거론되는 한국에서 삼성 반도체 하나가 사용하는 물만도 하루 평균 31만t이고 반도체 산업단지가 전격 가동되게 되면 매일 76만t의 물이 사용될 것이라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반도체 관련 소재, 부품, 그리고 장비 생산 공정에서 발암성, 유전독성, 생식독성 등을 가진 유해화학물질이 사용되는데 영업비밀 보호라는 명목으로 작업장 환경 정보는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다. 반도체 기업에서 인근 지역으로 배출하는 폐수, 휘발성 화합물, 유독가스, 고형폐기물이 반도체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인근 거주민들의 건강을 해치고 주변 생태계를 파괴해 생명이 깃들어 살기 어렵게 만들어도 정부는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
생활인구와 출산 급감으로 ‘지방소멸’을 걱정한다는 지자체들은 중앙부처에서 돈 내려온다고 덥석덥석 받아서는 안 된다. 본인 임기 내에 뽑아먹을 이익이나 챙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진정으로 지역의 미래를 걱정하고 대비하고 싶다면 기후위기 시대에 지역민들의 좋은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고민할 책임이 있다.
<한국이 싫어서>는 얼마 전 개봉된 영화다. 미래가 안 보이는 한국에서의 고달픈 삶을 뒤로하고 새로운 꿈을 꿔보기 위해 뉴질랜드로 떠난 한 청년여성의 분투를 다룬다. 이런 중 수도권이 아니라 소도시나 농촌에서 새로운 꿈을 펼쳐보기 위해 국내 이주한 청년여성들도 있다. 지역 소도시와 농촌을 선택해 삶을 일구려 애쓰는 기후위기 시대의 청년들이 무얼 바랄까? 한국이 싫다는 말 대신 소도시와 농촌의 삶이 살 만하고 좋구나 하는 말을 들어보고 싶다. 그런 나라에서야 미래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구가 계속 가열되고 있는데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개발사업만 계속되어선 안 된다.
박이은실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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