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철의 나락 한 알]농촌, 아픈 우리 손가락
지난 6월 말 북한산에서 손을 다쳤다. 평소 자주 다니던 익숙한 길이었는데 발이 꼬이면서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졌다. 다른 데는 괜찮은데 오른손 중지와 약지가 몸에 깔려 접질렸다. 자고 나니 손가락이 많이 부었다. 병원에 가니 당분간 손가락을 쓰지 않으면 괜찮아진다고 했다. 근데 그냥 뒀더니 시간이 갈수록 더 불편해졌다. 자고 나면 손가락이 뻣뻣해져 굽혀지질 않는다. 손가락을 천천히 힘껏 당겨야 겨우 주먹을 쥘 만큼 굽혀진다. 안 되겠다 싶어 다른 병원에 갔더니 인대를 다쳤는데 재활운동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거기서 일러준 대로 재활운동을 하고 나면 손가락이 조금 편해진다. 그런데 금방 다시 뻣뻣해진다.
손가락이 아프니 ‘몸의 중심은 머리나 심장이 아니라 지금 가장 아픈 곳’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웠다. 요즘은 다친 손가락이 내 몸의 중심이다. 시간과 신경을 가장 많이 쓴다. 그러면 몸이 편안하고 그러지 않으면 불편하다. 어디 몸만 그럴까. 우리 사회도 가장 아픈 곳을 중심에 놓을 때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올 추석을 얼마 앞두고 강원 철원, 경기 안성, 충남 부여 등에서 ‘논 갈아엎기’가 벌어졌다. 농부들이 나락이 그득한 논을 트랙터로 갈아엎었다.
지난해 가을 쌀 80㎏ 한 가마에 20만원대였던 산지 쌀값이 최근 17만원대로 떨어졌다. 농민 5000여명이 여의도에서 ‘밥 한 공기 쌀값 300원 보장’을 외친 것이 2018년 가을이었다. 한 가마로 치면 24만원이다. 최소한 그 정도가 돼야 벼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섯 해가 지났는데 쌀 한 가마 값이 20만원이 안 된다. 오늘 농촌의 현실이다. 정부는 농부의 발길, 손길이 88번 가야 한다는 가을 논을 갈아엎는 농심을 얼마나 헤아렸을까.
추석 앞두고 논 갈아엎은 ‘농심’
정부는 2005년 추곡수매제를 폐지하고 쌀 목표가격제를 도입했다. 2020년 목표가격제를 폐지한 정부는 쌀값이 떨어지면 쌀을 매입해 적정 가격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2022년 쌀값이 폭락했고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지난해 정부는 쌀 매입을 의무화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거부하고 대신 ‘쌀 한 가마 20만원’을 약속했다. 2019년 목표가격 21만4000원보다도 적은 액수였지만, 올해 그마저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오락가락하는 쌀 정책과 그 결과는 역대 정권이 농촌과 농민을 무시했고 관심도 없다고 알려준다.
최근 배추를 비롯한 각종 채소 가격이 폭등했다. 산지에서는 배추가 ‘녹아내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금배추’는 폭염과 폭우 탓이다. 특히 이번 가을 폭염과 폭우는 기후위기를 새삼 실감하게 했다. 여름은 더 더워졌고 여름 자체도 길어졌다. 농민들은 이제 정부의 무관심과 무시에 더해 기후와 씨름해야 한다. 배추 가격이 폭등해도 농민들은 생산비 급등으로 ‘금배추 팔아 동전 줍는’ 형편이다. 정부는 부랴부랴 중국산 배추를 수입해 소비자 가격을 안정시키기로 했다. 대책은 언제나 소비자 중심이고 생산자 농민은 소외된다. 극한 폭염과 폭우는 앞으로 계속 심해질 텐데 단기 대책만 있고 농민을 중심에 둔 근본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올해 초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자국 농민에게 ‘농산물 최저가격 보장제’를 약속했다. 우리도 이제 쌀은 물론 밀과 콩, 옥수수 등 주요 작물의 생산비를 보장하는 정책을 세워야 한다.
우리 농촌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희생됐다. 농촌에 기생해온 도시는 비대해졌고 도시를 먹여 살린 농촌은 쪼그라들었다. 이제 농촌 인구는 전체 인구의 4.2%, 그나마 65세 이상이 절반가량이다. 농지면적도 줄고 있다. 정부는 식량이 부족하면 수입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반도체나 자동차, 스마트폰이 우리나라를 먹여 살린다고 말한다. 착각이다. 사람을 먹여 살리는 건 농사다. 게다가 급변하는 국제 정세나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 팬데믹, 농사에 결정적인 기후의 불안정으로 해외 식량 공급망의 안정적 확보는 갈수록 불확실하다. 자유무역에 의한 식량 조달이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하다는, 실제로는 세계 곡물 메이저의 배만 불리는 신자유주의적 ‘식량안보’ 개념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식량주권’ 확보가 농촌의 미래
이제는 필요한 식량의 자체적 생산 능력을 뜻하는 ‘식량주권’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그라드는 농촌을 이제라도 우리 사회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사람은 먹어야 살고 먹을 것은 농촌에서 온다는 상식을 우리는 발전의 이름으로 부정했다. 상식을 외면하는 우리 사회가 농촌을 병들게 했다.
우리 농촌이 뻣뻣하게 부은 내 손가락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온갖 먹을 것을 우리 입에 넣어준 농촌이 우리 손가락 아닌가. 그런 농촌이 오래전부터 아프다. 늦었지만 정성껏 보살피니 아픈 내 손가락이 조금씩 나아지는 걸 느낀다. 농촌, 아픈 우리 손가락도 그렇게 돼야 한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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