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전범 몰려 처형된 친구 ‘만사’…철학없는 기교에 대한 경고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2024. 10. 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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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15> 이병주의 1968년 그리고 ‘마술사’
만사 :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

- 프랑스 68운동·프라하의 봄 등
- 세계적인 격동의 시기 1968년
- 출옥 후 연이은 사업실패로 좌절
- 출판사 차려 ‘마술사’ 등 책 제작

- 日운영 포로 수용소 감시원이던
- 소학교 친구 송낙규 억울한 죽음
- 마술사 기교 부리듯 술술 풀어내

- 스스로 프로페셔널 작가라 여긴
- 나림이 3일 만에 도피 중 쓴 중편

1968년은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큰 해다. 미국은 민권운동 열기와 반전시위가 극에 달하던 시기다. 로버트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이 저격당한 해다. 정치학자 드와이트 왈도는 ‘격동의 시기(time of turbulence)’라고 표현했다.

프랑스의 68운동을 비롯해 유럽 곳곳에서도 기존 질서와 권위에 반발하는 혁명적 흐름이 있었다. 68시위의 정신적 지도자 사르트르를 체포하자는 측근의 건의에 군인 정치인 드골 대통령은 “프랑스 정부가 볼테르를 잡아넣을 수는 없다”고 반대했다. “장군의 사상과 철학자의 사상이 같을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가졌던 나림이 특히 흔상(欣賞)하는 대목이다. ‘프라하의 봄’도 그해의 일이다.

일제강점기 인도네시아 자바의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었던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을 찍은 기록사진.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


▮1968

1968년 한국은 연초부터 대형 사건이 연이었다. 1월 21일 북한 무장 군인 31명이 청와대 근처 자하문 터널 앞까지 침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틀 후엔 미 해군 정찰함 푸에블로호가 동해에서 북한에 나포되는 일도 있었다. 4월에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는 등 반공 정책이 강화되었고, 12월엔 반공 문구가 들어 있는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되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며 외우던 기억이 아련하다.

나림 이병주에게도 1968년은 두 가지 큰 의미가 있다. 한편 도약했고 한편 좌절했다. 우선 소설가로서 도약의 해다. 나림은 한때 일간지와 잡지에 동시 다섯 편 소설을 연재한 적이 있다. 1968년은 나림의 소설 연재가 본격화한 시기다. 그해 4월부터 ‘월간중앙’에 ‘관부연락선’ 연재를 시작했고, 7월부터는 경남매일신문에 ‘돌아보지 말라’를 연재한다. 8월호 ‘현대문학’에 나림 초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 ‘마술사’가 게재된다.

다음, 사업가로서 실패한 해이기도 하다. 출옥 후 시작한 폴리에틸렌 공장은 한동안 잘 되는가 싶었는데 대기업의 덤핑으로 망했고, 불도저 서울시장 김현옥과의 인연으로 한 조립주택 사업은 모델 하우스까지 만들어 준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엄청난 부채가 남았고, 이후 5년에 걸쳐 갚는다. 당시의 악몽 같은 기억은 ‘행복어 사전’에서는 “돈 빌리러 다니는 일 없으면 괜찮은 인생이다”는 표현으로, ‘그해 5월’과 ‘망명의 늪’ 등에선 사업 실패담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김수영 신동문 리영희

1968혁명 당시 서베를린에서 벌어진 반전 시위. 위키피디아


1968년, 나림이 잊지 못할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동갑내기이자 인생 곡절 기구하기로는 난형난제인 시인 김수영과 마지막 술자리를 함께했다. 신동문이 근무하는 청진동 신구문화사는 문인의 사랑방이었다. 6월 15일 김수영이 원고료 받으러 나왔다. 김수영이 “한잔 낼 테니 가자”고 해도 별 대꾸가 없던 신동문이 한참 후 나림이 나타나자 반기며 술자리로 이어졌다. 술로나 화제로나 늘 좌중을 리드하는 나림에게 김수영은 “야! 이병주 이 딜레당트야!”하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무교동 오픈 살롱 발렌타인으로 옮겨 급하게 마신 김수영은 먼저 일어났다. 나림은 자기 자동차를 타고 가라고 권했으나 김수영은 뿌리치고 혼자 가다가 교통사고로 숨졌다. 최하림이 쓴 ‘김수영 평전’과 나림이 1971년 ‘세대’에 쓴 ‘학처럼 살다간 김수영에게’를 종합하면, 한 달 칩거했던 김수영은 그날 술을 맛있게 마셨고 경쾌하게 익살도 부렸다. “소주와 맥주를 급하게 마셔 불콰해진 김수영은 큰 눈이 더 커졌다”고 나림은 회고한다. 나림은 “일대 시인이 속세의 무대를 하직하는 마지막 대사로는 너무 서운하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고 애도했다.

그해 일이 하나 더 있었다. 10월에 나림은 자신의 출판사를 차리고 ‘마술사’를 포함한 초기 3부작을 묶어 단행본을 만들었다. 그 책을 해직 기자 리영희가 들고 다니며 외판했다. 리영희는 “‘마술사’를 들고 아는 중고등학교 교사들에게 안기고 월급날 수금했다”고 임헌영과 대화하며 회고했다. 리영희는 고급 술집에서 나림에게 술 얻어 마신 이야기도 많이 했다. 나림과 리영희 모두 루쉰 신봉자로 공통 화제도 많았고, 늘 국제문제에 대한 고담준론이 이어졌다.

▮사흘 만에 쓰다

나림은 스스로 소설 주문 제작자라고 했다. “나는 프로페셔널 작가다. 작품을 많이 써야 하고, 어떤 것도 쓸 수 있어야 한다”며, 청탁(淸濁)을 가리지 않고 원고 청탁에 응했다. 어떤 신문 잡지 방송의 청이라도 사절 없이 주문 제작했다. 그 시작이 1968년이다.

‘마술사’는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쓰게 했던 신동문의 청탁이었다. 빚에 쫓겨 회현동 여관에 피신해 있는 동안 사흘 만에 쓴 중편소설이다. ‘마술사’는 소학교 친구 송낙규를 위한 만사다. 친구에 대한 진혼(鎭魂)의 뜻으로 썼다. 송낙규는 동남아 지역에 산재한 일본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감시원에 자원해 버마에서 복무했고, 전후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일본은 1941년 진주만 공격 이후 동남아 지역을 빠른 속도로 점령했다. 그 과정에서 포로가 30만 명 발생했고 연합국 소속 백인 포로가 12만 명이었다. 포로 관리의 필요가 절실했다.

거기에 더해 포로와 관련 일본은 원죄가 있다. 1937년 난징 대학살이 바로 그것인데, 물론 그 참극은 그 어떤 이유로도 해명이 안 되는 비인도적 전쟁범죄이지만 굳이 일본 편에서 이유를 하나 더 찾자면 포로 수용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포로보다 학살을 결정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연유로 1942년 5월 포로 감시원을 크게 모집한다. 일본인은 전투원으로 투입해야 하니 비전투 인력 포로 감시원은 조선·타이완에서 충원했다. 2년 계약에 징병 면제 조건으로 3200명 모집해 부산에서 두 달 교육 후 동남아 곳곳에 배치했다. 전쟁 후 129명이 전범 유죄 판결을 받았고, 20명이 사형됐다. 도쿄 전범재판소는 체제를 갖춰 재판하느라 오래 걸렸고,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만 몇 사형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맥아더가 그마저 크리스마스 선물로 서둘러 재판을 종료했다. 천황은 아예 기소조차 하지 않았고, 기시 노부스케는 석방돼 총리까지 한다.

반면 동남아 전범재판소는 49곳에서 아주 신속하게 판결해 B급 C급 전범들도 처형했다. 송낙규 등 포로 감시원의 유죄 판결에는 포로였던 군인들의 증언과 지목이 결정적이었다. 감시원의 가혹 행위는 대부분 물이나 담배에 인색했던 것 등 사소했다는 증언도 있으나 콰이강의 다리 건설에 동원되었던 연합국 포로 1만6000여 명이 과로와 굶주림으로 숨져 갔던 것 생각하면 생존 포로로서도 이가 갈렸을 것이다. ‘콰이강의 다리’ 원작자 피에르 불은 포로 감시원을 “고릴라처럼 잔인한 조선인”이라고 매도했다.

▮마술·마술사·환각·예술

나림은 소설의 구성을 중시했다. 구성이란 포장지다. 리얼리즘은 묘사보다 구성에 있다고 믿는 나림은 ‘소설 알렉산드리아’에서 바로 그 구성력을 보여준 바 있다. 가슴의 고슴도치 같은 통분을 진정시키기 위해 옥중기를 쓰긴 하지만 대단하지도 않은 인물의 옥중기가 사실적 묘사 형태로 독자에게 읽힐 리 없으니 엑조티즘이란 포장지를 씌우고 사라 안젤이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조화가 극치를 이룬 허구의 주인공을 내세웠다. 결과적으로 그 소설을 쓴 덕분에 통분의 반이라도 풀렸고, 독자는 옥중기가 아닌 흥미로운 이야기로 읽어주었으니 두루 성공한 셈이 되었다.

같은 맥락으로 ‘마술사’도 친구 송낙규의 어이없고 억울한 죽음을 진혼하기 위해 구성력을 보인 것이다. 왜 나의 친구 송낙규는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특급 마술사인 크란파니 같은 멋진 인간이 되지 못했나? 왜 내 친구는 그 많은 포로 중 크란파니 같은 재능과 정신을 가진 인연을 만나지 못했나? 하는 한을 허구로 꾸며 본 것이다. 나림은 ‘마술사’에서 무엇보다 정신을 배우지 못한 기교는 경멸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송인규는 10년의 정진 끝에 마술이란 기능을 배우며 그 기교를 통해 갈채를 받았지만 인레 이외의 여성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정신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 번번이 정신 지키기를 어기고 결국 몰락한다. ‘마술사’는 한편의 잘 조작된 환각이다. 책을 덮고도 그 마술이 사실인지 환각인지 긴가민가하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도 환각이란 나림의 뜻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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