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시민방위군·불복종시민들이 일구는 희망

한겨레 2024. 10. 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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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홍명교의 이상동몽
접경도시 타이 매솟 르포

미얀마 군부독재에 맞선 사람들
국경지대 매솟에 ‘민주혁명’ 둥지
저항군 지원·미래세대 교육 열정
한국 시민사회 관심과 연대 큰 힘
매솟 외곽에 자리잡은 미얀마 이주민 학교에 아이들이 모여 있다.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시민사회단체모임 제공

우르르 쾅쾅! 하늘빛이 번쩍거리더니 요동치는 듯 굉음이 들린다.

“번개 치나 봐?” 그러자 미얀마인 활동가 짜우 모에(가명)가 알려준다. 조금 전 이곳 매솟에서 불과 3킬로미터 떨어진 미얀마 국경도시 먀와디(미야와디)에서 군부의 공중폭격이 있었다고.

매솟은 미얀마 군부 탄압과 학살로 인해 고통받던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이주해 온 타이(태국)의 난민 도시다. 지난달 말, 나는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해 캠페인과 모금,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온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 시민사회단체모임’ 활동가들과 함께 이곳에 왔다. 미얀마에서 시민방위군(PDF)과 시민불복종운동을 거쳐 이주해 온 사람들, 군부에 의해 파괴된 고향을 떠나 피난 온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장을 직접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이 여정은 시민단체 해외주민운동연대(KOCO)의 오랜 교류와 밑거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론의 시야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최근 미얀마는 쿠데타 이후 가장 혼란스러운 정세를 보내고 있다. 작년 10월 북부에서는 기존 소수민족저항군(ERO)과 시민방위군이 연합해 군부에 대대적 반격을 가했고, 미얀마 전역의 타운십에서도 마찬가지다. 군부가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영역은 점차 줄어들어 이제 절반 수준이다.

타이 매솟에서 바라본 타이-미얀마 국경지대.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시민사회단체모임 제공

“조국의 재건을 위해 공부하렴”

매솟에는 이처럼 저항군에 가담했다가 몸과 마음을 다친 사람들이 이룬 공동체가 여럿 있다. 그중 하나는 2021년 2월 쿠데타 발생 후 변방으로 숨어 들어간 청년들에 의해 창립됐다. 중학교 영어교사, 인터넷 설치기사, 대학생 등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산속에서 한달 반 동안 군사훈련을 받고 저항군이 됐다. 군부에 맞서 싸우다가 한쪽 다리를 잃거나 죽어간 동지들도 있었다.

이제 이들은 매솟에서 지원금을 모아 식량이나 의약품을 구매하고, 나룻배로 국경을 몰래 넘어 저항군과 주민들에게 전달한다. 은밀하게 전해야 하기에 그 여정이 험난할 수밖에 없다. 또 이들은 미얀마 내 난민을 지원하고 부상당한 저항군을 위한 치료센터도 운영하고 있다.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어두운 정세와 달리, 이들은 우리에게 다른 전망을 이야기했다. 한 활동가는 쿠데타 이후 시민방위군에 가담한 수가 점점 늘고 있다면서 두 가지 이유를 말해줬다. 지난해 가을부터 정세가 급변하면서 군부가 수세에 몰렸고, 올해 2월 군부가 부족한 병력을 채우려 징병 계획을 발표한 뒤 약 14만명의 시민이 징병 대상이 되자 저항에 소극적이던 사람들마저 ‘군부의 총알받이가 되느니 시민방위군에 가자’고 마음먹게 됐다는 것이다.

2024년 들어 미얀마 난민이 급증한 이유 역시 내전과 군부의 강제징집 때문이다. 2024년 4월 먀와디에서 카렌민족연합(KNU)과 군부가 치열한 교전을 벌이면서 약 3천명이 매솟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쿠데타 이후 매솟으로 온 미얀마인은 약 5만명으로 추산된다.

최근 매솟과 마주한 먀와디에서는 연일 군부와 저항군 간 전투가 이어지고 있다. 시민방위군과 카렌족 연합군이 지상에서 마을을 되찾으면, 얼마 후 군부 전투기가 나타나 무차별 폭격을 쏟아붓는다. 이런 공방이 계속되면서 사망자는 연일 늘고 있다. 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AAPP)에 따르면, 10월2일 기준 군부에 의해 사망한 시민은 5726명에 이른다. 아직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더 많을 것이다.

매솟 외곽에 위치한 미얀마 이주민 학교를 찾았을 때, 이곳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교사 마웅 윈이 말했다. 자신과 수십년 동안 함께 활동하던 친구가 지난 주말 군부에 끔찍하게 살해됐다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9년이나 체류했던 그가 고국에 다시 돌아간 이유는 군부에 맞선 ‘민주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이주민 학교에서는 1200여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었다. 시민방위군에 가담했다가 이곳에 와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에게 “학생들이 ‘미얀마를 위해 뭘 할 수 있냐’고 물으면 뭐라고 이야기해 주는지” 물었다. 그런 일이 자주 있기 때문인지 그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가지 말고, 이곳에서 해방 이후 고국의 재건을 위해 공부하라”고. “우리가 아직 승리하지 못한 것은 시민방위군의 숫자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학살로 대응하는 군부에 맞설 무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난해 한국 시민사회는 매솟에 비스킷 생산 시설과 인력을 지원하기 위해 모금 사업을 펼쳤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매솟에 작은 집을 임대했고, 비스킷 생산 설비와 사람, 재료를 구했다. 모든 것이 수공업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활동가들이 손수 반죽하고 오븐에 구운 비스킷이 미얀마 전역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지금은 한달에 2만개를 만들 수 있는데, 작년 6월에 시작해 내년 5월까지 정확히 2년 동안 지속할 예정이다. 4조각이면 한 사람의 하루 영양분과 열량을 책임질 수 있다고 하니, 최소한 2만명이 한달을 버틸 수 있는 수준이다.

미얀마 시민방위군(PDF) 출신 청년그룹이 매솟을 방문한 한국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환영하며 차려준 저녁 식사.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시민사회단체모임 제공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지난 1일 밤, 시민방위군 출신 청년 그룹과의 짧고 아름다웠던 저녁 식사를 했다. ‘함께 살자’는 모토로 매솟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부대 지휘관의 부패를 고발했다가 도리 없이 정글을 떠나야 했던 10명의 혁명가들이다. 겉만 보면 이들에게 ‘실패’ 혹은 ‘탈영’이라는 멍에가 덧씌워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이 마주해야 했던 아이러니와 비극은 결코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식사를 마칠 즈음 그룹의 리더 윈 미앗 아예가 자신들이 시민방위군에 있었을 때처럼 경례해도 되겠느냐고 제안했다. 비록 정글은 자신들을 버렸지만, 여전히 자신들을 잊지 않고 이곳까지 찾아준 외국인들에게 인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슬픔과 헌신으로 가득한 경례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지난해 서울의 한 도시빈민 조직은 몇년 동안 모아두었던 기금 600만원을 이들에게 전달했다. ‘함께 살자’는 가치 아래 조직은 연결돼 있다.

우리는 전쟁과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어떻게 해야 이 폭력과 억압을 저지할 수 있을까? 미얀마 접경에는 여전히 온몸으로 자기 삶을 증명하며, 불복종과 희망의 근거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겐 첨단 무기나 정보력이 없지만, 빛나는 두 눈동자를 보지 않으면, 기타를 치며 부르는 미얀마어 혁명가를 듣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힘이 있다. 우리가 잊지 않고 연대를 이어간다면, 이들은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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