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가을, ‘B급’이지만 ‘비급’ 될 그런 여행지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이 왔다. 팔꿈치를 툭 치고 가는 바람이 시원하다. 하늘도 어느새 가을빛이 완연하다. 저녁 무렵 주홍빛으로 물드는 노을이 예쁘다. 여행하기 안 좋을 때가 있겠냐마는 지금이 가장 여행하기 좋을 때가 아닐까 싶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먼 산 너머에서 밀려오는 노을을 바라보며 떠나고 싶어 두근댄다. 그래서 떠났다. 세상에는 떠나지 않을 이유보다 떠나야 할 이유가 훨씬 많다.
지난번 경북 상주에서 시작해 성주와 구미, 군위를 여행했는데 좋았다. 이번에도 경북으로 갔다. 그런데 코스가 조금 길다. 안동에서 시작해 청송과 영천, 청도와 경주를 지나 포항까지 갔다. 많은 도시를 지나지만 그렇게 사실 그렇게 긴 여정은 아니다. 3박4일이면 그럭저럭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다. 예전엔 한 도시를 샅샅이 보겠다고 골목골목 기웃거리고 다녔지만 지금은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길 따라 쭉쭉 간다. 여러 여행을 경험해 보니 또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길모퉁이 산자락을 돌 때마다 조금씩 바뀌는 풍경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고장과 고장의 특징을 비교해 보는 색다른 맛도 있다.
세 손가락 안에 꼽는 온천
일본에는 ‘비(B)급 구루메’라는 음식 ‘장르’가 있다. ‘미식가’를 뜻하는 영어 단어 ‘궈메이(gourmet)’의 일본식 발음 앞에 ‘비(B)급’을 붙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유명하거나 제대로 된 요리인 ‘에이(A)급 구루메’와는 달리 가격이나 소재가 흔하고 저렴한 것들로 만들어지는 음식을 뜻한다. 각 지역이나 마을의 특산품을 사용한 요리도 많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닭내장탕이나 허파전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을 여행하며 이런저런 비급 구르메를 많이 맛보았는데 의외로 맛있는 것이 많았고, 에이급에 견줘도 뒤지지 않는 맛을 내는 음식도 많았다.
그러다가 여행도 ‘비급 여행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안동의 하회마을이나 병산서원, 경주의 대릉원과 불국사, 청송의 주왕산, 영천의 은해사 등은 에이급이지만, 그 지역엔 분명 에이급에 뒤지지 않는 비경을 자랑하는 비급 여행지가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 것이다. 실제로 여행작가로 일하는 동안 ‘별것 아닌데’ 하는 여행지(어디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가 지방자치단체의 마케팅과 광고력 덕분에 뜬 곳을 보아 왔다. 막상 가 보면 별 게 없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몰린다. 반면에 전혀 홍보하지 않는 시시한 곳 같은데 가보면 의외로 대단한 곳도 있었다. 일본의 경우 홋카이도의 아오이케(청의 호수)라는 곳을 10여 년 전 방문했을 때 이곳은 일본인도 모를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었다. 처음 보는 순간, ‘아 이런 곳이 어떻게 지금까지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이곳을 매일 보는 사람들은 평범하다고 여길 지 모르겠지만 나같은 외지인에겐 숨은 보석처럼 눈에 번쩍 띄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한해 두해 지나고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홋카이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 중 한 곳이 되어 ‘걸어다닐 틈이 있으면 사람이 적은 편’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지금 내가 가는 곳이 나중에 걸어다닐 틈도 없이 유명한 관광지가 된다면 뭔가 뿌듯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난 거기 아주 옛날에 가봤거든 하고 자랑할 수도 있을 테고.’ 이런 마음으로 미래의 특에이급 여행지가 될지도 모른 비급 여행지를 향해 시동을 걸었다. 비(B)급이지만 언젠가 ‘비급(祕笈·가장 소중히 보존되는 책)’이 될 그런 여행지.
지난 9월 넷째주에 떠난 첫 여행지는 안동의 도산온천이다. 새벽에 출발해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뜨거운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피로도 풀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큰 즐거움이 됐다. 안동 도산온천은 지난해 처음 찾았는데 너무 좋아 이번 여행의 첫 목적지로 선택했다. 도산서원은 들어본 사람이 많겠지만 도산온천은 조금 생소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곳은 내가 세 손가락(물론 개인적인 취향이다) 안에 꼽는 온천이다. 처음 도착하면 다소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가건물로 대충 지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건물은 온천이라고 부르기엔 다소 민망할 정도다. 들어가기에 앞서 뭔가 의심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입장권을 끊고 탕으로 ‘남탕’이라고 쓰인 입구로 들어갈 때도 그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탈의실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 온천이 아니라 1980년대 동네 목욕탕에 들어온 것 같다. 그래도 일단 들어왔으니 탕에 몸이라도 담그자 하는 마음으로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서면 딱 3개의 탕으로 이루어진 목욕탕이 나타난다. 고온탕과 보통탕, 냉탕. 요즘 웬만한 온천에서는 다 볼 수 있는 미네랄탕, 쑥탕, 녹차탕, 옥탕 같은 건 없다.
좋은 글과 사진보다 좋은 삶이 우선
이른 시각이라 사람도 없다. 편한 마음으로 탕에 들어가니, 웬걸 물이 너무 좋다(물론 개인적인 의견이다). 바닥의 타일도 샤워기도 모두 옛날 스타일이다. 하지만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탕 입구에는 ‘은혜온천 수질안내’라는 안내판이 있는데(옛날에는 은혜온천이라고 불렀다) 수소이온농도(pH) 9.26으로 약알칼리성 온천수다. ‘노화방지(일명 불노수), 피부미용, 신경통, 심장병, 당뇨병, 류마티스’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유명하다고 하는 온천의 효과와 효능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 잘 모르겠다. 직접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남들이 효과가 있다고 하니 그러려니 할 뿐이다. 그런데 온천이라는 곳이 원래 그렇게 이용하는 게 맞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 “역시 그렇죠. 세상사의 피로를 풀기엔 온천만큼 좋은 게 없죠”하며 느긋하고 맘 편하게 시간을 보내다 오면 되는 것이다.
도산온천이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사연은 대략 이렇다. 원래는 이곳을 대규모 온천단지로 개발하려고 간이 온천장을 먼저 지었다. 그게 1992년이다. 당시 문을 열었을 때 물이 좋기로 소문나 하루 이용객이 2000명 가까이 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 학가산에서 온천이 터졌다. 하회마을과 봉정사 등과 더 가까워 접근성이 좋고 안동시 부지라서 개발하기도 더 쉬워 도산온천 쪽은 외면받았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도산온천은 당시에 지어진 간이온천 형태인 것이다.
온천을 마치고 나오니 피부가 부드러워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오랜 운전 후 탕에 들어갈 때의 기분과는 또 다르다. 온천에서 나와 시원한 바람을 맞는 순간 여행의 의지 같은 것이 솟아난다. 이번 여행은 분명 평화롭고 순조로울 것이라는 예감도 든다. 온천은 노화방지와 피부미용에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낙관에도 효능이 있다.
다음 코스는 미술관이다. 안동에 송강미술관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이 있다. 논과 밭 사이를 구불구불 따라가다 보면 초록색 잔디밭 위의 새하얀 건물이 갑자기 나타난다. 이런 곳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1995년까지는 송강초등학교였지만 2023년 미술관으로 개관했다고 한다. 문을 연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이제 알려지기 시작해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안동의 하회탈을 전시해 놓은 공간이 있다. 그리고 전시실이 이어진다. 전시실은 1관부터 3관까지 있으며 다양한 전시가 열린다. 내가 갔을 때는 아시아 사진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미술관 본관 옆에는 떡에 다양한 문양을 찍는 도구인 떡살만 모아놓은 별도의 전시실이 있다. 안동문학관도 있는데, 안동이 고향이거나 안동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를 본 후 미술관 옆에 자리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창밖으로 구름이 두둥실 흘러간다. 오늘 본 전시회의 작가가 자꾸 떠오른다. 그는 중국의 어느 마을이 좋아 그곳에 1년 동안 머물며 작업을 했다고 한다. 강렬하면서도 서정적인 흑백 사진들 앞에서 오래도록 왔다 갔다 하며 ‘언젠가 나도 이런 삶을 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어떤 장소가 좋아 그곳에 머물며 사진 작업을 할 수 있는 인생. 옛날 같으면 ‘나도 이런 사진을 찍고 싶다’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좋은 글을 쓰고 좋은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좋은 삶을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제 영천으로 간다. 영천에서 찾을 곳은 만취당이다. 은해사와 모고헌, 옥간정을 가본 적이 있는데 만취당은 처음이다. 일단 이름이 좋다. 만취라니. 한잔 술이 생각나는 이름이지만, 이 만취는 우리가 흔히 아는 술에 몹시 취하는 만취(漫醉)가 아니다. 만취당의 만취(晩翠)는 ‘늦게까지 푸른,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푸름’을 뜻한다. 늙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삶의 지조를 비유한 것이다. 송나라 재상 범질이 자신을 벼슬에 천거해 주기를 바라는 조카 범고에게 지어준 글에서 유래한 것이다. 범질은 조카에게 ‘더디게 자라는 시냇가의 소나무는 울창하게 늦게까지 푸름을 머금는다’라며 경계의 글귀에서 써주었다.
“빨리 이룬 것은 견고하지 못하고”
‘소학’에도 “빨리 이룬 것은 견고하지 못하고/ 빨리 달리면 넘어질 때가 많은 것이다/ 더디게 자라는 시냇가의 소나무는/ 울창하게 늦게까지 푸름을 머금는다/ 타고난 운명은 빠르고 더딤이 정해져 있으니/ 입신출세를 사람의 힘으로 이루기는 어렵다/ 제군들에게 일러 말하노니/ 조급히 나아감은 부질없는 짓일 뿐이니라”라고 나온다. ‘만취’라는 이 뜻이 좋아 당호로 사용한 곳이 영덕과 영주, 의성에도 있다. 영천의 만취당은 조선 정조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학신(1732~1800)이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곳으로 사랑채인 만취당 마루에 ‘만취당’ 편액이 걸려 있다.
요만큼이라도 살아보니 ‘만취’라는 뜻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간다. 젊은 시절 일찍 얻은 명성과 이룬 성공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부질없는 것이다. 나 역시 한때 나보다 앞서 나갔던 이들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며 질투했던 적도 있었지만 왜 그랬나 싶다. 알게 모르게 사라진 이들도 많고(물론 나 역시 사라진 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다른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도 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보폭이 있고 리듬이 있다. 거기에 맞춰 가다 보면 당도하게 되는 곳이 있다. 글을 쓰는 것에도, 음악을 만드는 것에도, 사업을 이루는 것에도 다 때가 있는 법. 조급해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꾸준히 걸어가면 된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것이다. ‘소학’이 일러준 바대로 “조급히 나아감은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만취당 앞에 서서 편액을 바라본다. 아직 내게는 전성기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 더 있다가, 5~6년 후나 10년 후도 괜찮겠다. 나중에 전성기가 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50을 갓 넘긴 지금을 더 겸손한 마음과 태도로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만취당 처마 그늘이 옅어진다. 날이 저물고 있다. 주차장에서 나와 하룻밤 묵을 곳으로 간다. 오늘은 영천에서 잔다. 이번 여행의 일정은 안동에서 영천을 지나 청도를 돌아본 후 경주와 포항, 청송을 지나 올라올 예정이었으니 내일 아침 청도를 향해 출발할 것이다.
숙소가 있는 영천 시내로 가는 길, 길이 골짜기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지난번 경북 북부를 여행하며 국도와 지방도를 따라 달리며 우리나라는 산악국가라는 걸 실감했다. 길은 산등성이와 골짜기를 따라 위태롭게 나아갔다. 창밖으로는 안간힘으로 이룬 논과 밭이 보였다. 조금이라도 평평한 곳이 보이면 사람들이 뭐라도 심어놓은 걸 볼 수 있었다. 조금 넓다 싶은 들엔 벼가 자라 어느덧 황금색으로 물들고 있었고, 계곡 옆 비탈엔 고추와 가지 같은 작물이 초록으로 짙었다. 예전엔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런 게 보인다. 와, 정말 악착같이 땅을 일구었구나 감탄한다. 인간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나 역시 그렇다. 천하태평의 인간처럼 보이지만, 여행 가방 속에는 곧 내야 할 새 책의 원고가 들어 있다. 저녁을 먹고 여관에 들어가 원고를 조금이라도 고치다가 자야 한다.
여행 중에 일을 하고, 일을 하며 여행을 한다. 누군가는 이런 인생을 부러워하지만,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문득 송강미술관에서 본 사진작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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