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정치 바람에 흔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빛과 그늘

2024. 10. 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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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의 예술과 정치
104년 역사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올해도 44일간 25만명의 관객이 172개의 오페라, 연극, 콘서트를 관람했고 객석점유율 98%를 기록했다. [사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사무국]
유럽에서 클래식은 축구처럼 8월말 시작해 이듬해 6월 한 시즌을 마무리하는 추춘제로 실시한다. 오프시즌인 여름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은 음악 행사를 넘어 오버투어리즘 논란을 낳는 관광상품이 됐다. 하지만 정해진 루틴에 맞춰 스케줄을 반복하다보면 타성에 젖기 마련이고, 관성을 견제해야 하는 아티스트부터 ‘예술의 오늘’을 확인하는 축제를 갈망하게 된다. 휴가철 유럽 전역에서 무수히 열리는 축제 가운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중부 유럽이 여전히 클래식의 핵심이며 잘츠부르크가 그 중심임을 알리는 자리다.

1920년 연극 ‘예더만’으로 시작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올해 104회를 맞아 7월 중순부터 8월말까지 열렸다. 상주 악단 빈 필하모닉과 객원 악단 베를린 필하모닉,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이 지휘자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리카르도 무티, 키릴 페트렌코, 사이먼 래틀의 호화 진용으로 잘츠부르크를 찾았다. 피아니스트 그리고리 소콜로프, 예브게니 키신이 독주회를 가졌고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은 마티네에 출연했다. 페스티벌 사무국은 44일간 약 25만 명이 172개의 오페라, 콘서트, 연극을 관람했고 98퍼센트 객석 점유율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여성은 이브닝가운, 남성은 턱시도의 성장(盛裝)을 권유하는 전통은 그대로지만, 축제 관련 돈의 흐름은 역동적이다.

여름 시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산은 약 6500만 유로(한화 약 960억원), 올 여름 축제 동안 티켓 매출과 대기업, 후원회 기부금 등 각종 수익은 약 3000만 유로(한화 약 444억원)다. 오스트리아 재계는 축제의 경제 효과를 약 3억 유로로 평가한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오스트리아를 넘어 ‘유럽 소프트파워의 요체’로 부를 만한 크기다.

올해 44일간 25만 명이 172개 공연 관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의장 크리스티나 해머(왼쪽), 예술감독 마르쿠스 힌터호이저. [사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사무국]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세계적 축제로 자리 잡은 계기는 전쟁이다.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알프스 약소국으로 전락한 오스트리아의 정세가 지지부진했던 잘츠부르크 축제 출범엔 호재로 작용했다. 1919년 생제르맹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독일 합병이 무산되면서, 행사 방향은 오스트리아의 자존 강화에 모차르르를 선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초반부터 빈의 아방가르드 예풍을 담은 플랫폼을 지향했고 그 결과로 빈 출신의 유태인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당대 음악도 포용했다. 나치 반대를 분명히 한 지휘자 브루노 발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히틀러의 폭정을 피해 이곳에서 기틀을 잡았지만,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축제를 떠났다.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감독 경력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나치와 끈을 유지하며 잘츠부르크에 입성했고, 카를 뵘,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조지 셀 등 신진과 중견이 거장들의 공백을 틈타 세계 중심에 데뷔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 내정 혼란으로 축제는 흔들렸지만 1954년 잘츠부르크 출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예술감독에 선임되면서 혁신을 이뤘다. 카라얀도 나치 부역 이슈가 있었으나 축제에 화제와 돈을 몰아주면서 논란을 잠재웠다. 카라얀은 자신이 감독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들였고 페스티벌홀을 신축했다. 페스티벌 자체 오페라 신작을 제작하고 오페라와 콘서트에 당대 최정상 성악가를 불렀다. 조수미도 카라얀의 오디션을 거쳐 ‘가면 무도회’ 녹음과 출연이 정해졌지만 1989년 카라얀 사망으로 축제를 함께 하진 못했다.

카라얀은 재임 기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사무국과 의도적으로 긴장 관계를 조성하며 원하는 바를 얻었다. 1960년 페스티벌홀 신축을 기념해 오스트리아 정부가 핵전쟁 반대의 정치 메시지를 투사하자 카라얀은 권력의 축제 개입으로 간주해 예술감독직을 던졌다. 아울러 바이로이트, 뉴욕 메트 오페라로 떠난다는 소문을 지렛대 삼아 카라얀의 잘츠부르크 잔류 여론을 조성했다. 4년여 줄다리기 끝에 카라얀은 축제를 다시 맡았고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 신설을 관철했다. 재임 기간 다른 오페라극장 감독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카라얀은 1955년 영세중립국을 선언한 오스트리아의 노선을 활용해, 불가리아 베이스 니콜라이 갸우로프 등 동구권 음악가를 불렀고, 경쟁 축제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의식한 바그너 악극을 만들었다. 로린 마젤, 클라우디오 아바도, 오자와 세이지, 주빈 메타에 이르는 유망한 지휘자들이 카라얀 소개로 잘츠부르크 무대에 올랐다.

카라얀 사후, 세기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침체가 계속됐다. 후임 예술감독 제라르 모르티에는 거목의 그림자를 지우는 작업에 매진했고 리카르도 무티는 이에 반발해 한동안 축제를 등졌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었던 2006년은 무티의 공백을 로저 노링턴,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메웠다. 카라얀을 대체할 거물에 목말라한 축제의 속사정을 간파한 건 러시아 자본이다. 2000년대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마린스키 극장 예술감독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러시아 후원을 등에 업고 잘츠부르크를 누볐다.

2017년 무지크아테르나 감독 테오도르 쿠렌치스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데뷔하면서 러시아 에너지 기업 가스프롬이 축제 전면에 등장했다. 페스티벌의 핵심 후원가 집단인 유태인 그룹의 비토가 있었지만 이사회 의장 헬가 라블 슈타들러는 기존 스폰서 네슬레를 대신할 자금원으로 가스프롬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 2019년 축제와 가스프롬의 공식 후원 계약이 체결됐고 축제 예술감독 마르쿠스 힌터호이저는 가스프롬이 후원하는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초연에 푸틴을 초대했다. 공교롭게 이 공연은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 사망으로 열리지 못했고, 푸틴 방문도 흐지부지됐다.

서방 에너지 그룹들, 페스티벌 재정 주시
32년 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음악감독을 역임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사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사무국]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가스프롬 관계는 끊어졌다. “문화와 정치는 분리할 수 없다”는 서방 압력에 27년간 이사회 의장을 맡던 슈타들러가 가스프롬을 끌어들인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2024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프로그램은 새 의장 크리스티나 해머와 예술감독 힌터호이저 사이에 러시아를 바라보는 시각 차를 드러냈다. 러-우 전쟁 개전 이후 쿠렌치스는 서유럽에서 왕따가 됐지만, 힌터호이저만큼은 이단아의 예술성을 잘츠부르크에 선보이자는 입장을 견지해 쿠렌치스는 ‘돈조반니’를 지휘했다. 반면, 다국적 기업에서 브랜드 관리 경력이 풍부한 해머는 뚜렷한 반 푸틴 행보를 보였다. 먼저 축제 기조 연설에 러시아 현대사 전문가인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의 증손녀 니나 흐루쇼프를 불러 푸틴 정부를 맹비난했다. 연극 분야의 새 감독 마리나 다비도바 역시 우크라이나 침공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작품을 진열했다. 지난해 ‘예더만’의 주역 미하엘 마르텐스가 옥사한 반 푸틴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옥중 서신을 낭독했고, 미망인 율리아 나발라야가 참석을 타진하기도 했다. 반러-친러가 한 축제에 공존한 것도 중립국 오스트리아여서 가능하다.

리노베이션과 새 공연장 건립을 계획하고 있는 해머 의장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향후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후원 자본을 찾아낼진 의문이다. 해머는 공연장 건립에 1200만 유로의 기부를 유치하고 공구업체 뷔르트의 후원 계약을 따냈지만 3년짜리 단기 스폰서다. 미술관, 미술품 후원으로 공해 사업의 폐해를 가린다는 ‘그린워싱’ 비판 때문에 미술관, 박물관 후원을 중단한 서방 에너지 그룹들이 가스프롬이 빠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재정 상태를 주시하고 있다. 기후변화를 경고하는 작품을 제작한다면서도 가스프롬과 손잡았던 축제의 행태는 오스트리아 시민 감시가 없다면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빈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안병영 전 교육부 장관이 정리했듯, 오스트리아 근대 정치는 융합과 재창조 능력으로 진보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독일 통합이 무산된 상실감을 달래는 이벤트로 시작해 카라얀의 독재로 성장했고, 그를 대신할 메시아를 러시아에서 기대하며 더러운 자본과도 손을 잡았다. 지금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오스트리아적’인 게 무엇인가에 대한 자성이 필요하다. 근본적으론 축제 권력을 둘러싼 유태 자본과 오스트리아 저변의 반유태주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고민과 해결 과정이 오스트리아 시민 사회와 함께 하지 않으면, 결국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같은 잘츠부르크 축제의 환희는 이방인이 즐기다 사라지는 신기루에 머문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변혁의 계기다.

한정호 공연평론가·에투알클래식 대표. 런던 시티대 대학원 문화정책 매니지먼트 석사. 발레리나 박세은, 축구인 박지성 등 예술 체육계 명사의 에이전시와 문화정책 자문을 담당하는 에투알클래식 대표를 맡고 있다. 월간 객석, 일본 오케스트라연맹에서 일했고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다양성위원회 민간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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