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대의 사법부, 지연된 정치인 재판 신속히 해야 [쓴소리 곧은 소리]
‘선거법 위반’ 기소된 22대 의원들도 6개월 내 1심 선고 나와야
(시사저널=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 원장)
빅뱅으로 치닫는 정치권의 김건희 여사 문제가 중요할까? 소리 없이 곪아가고 있는 사법부의 재판 지연 문제가 더 중요할까? 두말할 것 없이 김 여사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한 발짝만 더 들어가면 재판 지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재판 지연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인 데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를 비롯한 여야 국회의원 수십 명의 정치적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이 문제가 급부상한 이유는 조희대 대법원장이 작심하고 나서서 '재판의 신속화-정상화론'를 내세우며 실질적인 조치들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바짝 긴장하며 전투 모드에 돌입한 분위기다.
"이 대표의 정치 생명, 재판 속도에 달렸다"
지난해 12월 취임 때부터 재판 지연 해소를 최우선 과제로 꼽았던 조희대 대법원장은 법관들에게 "선거법에 명문화된 6-3-3 법을 반드시 지켜 달라"고 당부하며 정치인들에 대한 신속한 재판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법원행정처는 각급 법원에 공문을 보내 정치인 및 선거범 재판에 속도를 내줄 것을 요청하고 구체적인 지침을 하달했다. 조 대법원장이 강조한 '6-3-3법'이란 선거범 재판의 1심은 6개월 내, 2심과 3심은 각각 3개월 내에 끝내라는 공직선거법 270조의 강제 규정인데, 언제부턴가 판사들이 이를 '훈시 규정'으로 해석하고 무시하기 시작했다. 조 대법원장은 앞으로는 이 규정을 꼭 지켜 달라고 지침을 내린 것이다. 여기에는 사법부의 대국민 신뢰 회복이라는 명분과 함께 현실 정치적 의미도 담겨 있다.
우선 현 정국의 키맨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이 규정에 따라 정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 현재 공직선거법과 위증교사 혐의로 각각 징역 2년과 3년을 구형받은 그가 만약 오는 11월 1심 재판에서 벌금 100만원 이상 판결과 금고 이상 징역형을 받고 2027년 3월 대선 전에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확정되면 차기 대선에 출마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이 지연되어 대선 이후로 넘어가면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 이 대표의 대선 출마가 재판 지연 여부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일부 언론은 "이 대표의 정치 생명이 재판 속도에 달렸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민주당 내에서는 '재판 지연 작전'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다수 의석의 입법 권력을 활용해 사법부가 재판을 최대한 연기하도록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위야 알 수 없지만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 1심 재판의 경우, 2022년 9월에 기소되었으나 담당 부장판사가 도중에 사표를 제출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당초 법정기한인 6개월을 4배 이상 넘겨 오는 11월에야 판결이 내려지게 됐다. 2심, 3심은 기약할 수도 없다.
이런 재판 지연 사태가 반복되면 '거대 야당의 사법부 무력화'나 '이재명을 위한 방탄용 재판 지연 전술'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유력 정치인의 재판이 자꾸 지연되면 두 가지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난다. 우선 피의자나 피고인은 재판이 지연되는 기간 내내 집권세력을 향해 "명백한 범죄증거도 없는데 정치보복을 한다"고 주장하게 되고, 재판부는 정치권의 눈치를 살핀다는 비판을 받아 본의 아니게 사법부의 권위가 추락한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의 재판 지연 상황도 심각한 수준이다. 그는 1,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 판결이 5년째 지연되는 바람에 그사이에 당을 만들어 총선에 출마해 금배지를 달고 총 12명의 의석을 가진 제3당 대표가 되었다. 그는 2022년 2월 표창장 위조 문제로 1심 재판을 받을 때 담당판사의 돌연한 휴직, 기피신청 논란, 재판부 교체 등으로 재판이 계속 연기됐다. 덕분에 조국 대표는 지금도 재판 중인 피고인 신분인데도 국민 대표가 되어 국회에서 대정부 투쟁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보통 시민이라면 도저히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사실 국민이 볼 때, 정치인에 대한 재판이 너무 늘어지면 그가 진짜 잘못을 저질렀는지,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고 언제쯤 끝날지 알 길이 없고 피로감이 생긴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2년 반이 다 되었는데 이재명·조국 재판이 끝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法諺)은 이 경우에 적용된다고 할 것이다.
조희대 사법부가 정치인 재판에 속도를 내고 가시적인 성과를 낼 경우 후폭풍이 불 수 있는 이유는, 연루된 정치인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이번 22대 국회만 해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과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여야 현역 국회의원이 모두 23명에 달한다. 이들에 대한 재판이 6-3-3 법에 따라 신속하게 진행되고 상당수가 유죄 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할 경우, 재보궐선거가 동시다발적으로 실시되어 정국이 요동칠 수 있다. 실제로 역대 정부에서 정치인들에 대한 재판 결과와 재보궐선거가 정계개편의 수단이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21대 국회를 되돌아보면, 재판 지연에 따른 폐해와 부작용은 더욱 막심했다. 일반인들은 재판 지연 때문에 소송 비용 증가, 일상생활의 중단, 심리적 압박감 등으로 고통을 겪을 텐데, 정치인들은 오히려 재판 지연 때문에 큰 특혜를 누렸다.
헌법, '모든 국민, 신속히 재판받을 권리' 명시
당시 최강욱-윤미향-하영제-윤관식-이성만-허종식 등 무려 20여 명의 국회의원이 선거법 위반과 공금횡령 혐의 등으로 당선무효형을 받았는데도 최종 확정 판결이 늦어진 덕분에 4년 임기를 다 채우거나 상당 부분을 채웠다. 황운아 조국혁신당 의원의 경우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 개입 혐의로 2020년 1월에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아직까지 4년 넘도록 2심 재판이 진행 중이어서 21대 국회 4년 임기를 다 채우고 다시 22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같은 혐의로 재판 중인 송철호 전 울산시장도 피고인 신분으로 임기 4년을 다 마쳤다. 이 기간 동안에 이들은 어찌 보면 범죄자 신분인데도 국민의 대표, 주민의 대표임을 자처하며 공개활동을 마음껏 펼쳤고 세비도 꼬박꼬박 챙겼다. 가뜩이나 국회의원 특혜 논란이 많은 터에 엄청난 부당이득이 아닐 수 없다. 정치인들은 죄를 지어도 정치적 영향력으로 재판을 잘만 끌면 별 탈 없이 임기를 채울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온 국민에게 보여준 셈이다. 여야와 보수·진보를 떠나 꼭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27조 제3항에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조항이 있다. 최근 6년 동안 1심, 2심, 3심 판결 기간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올 상반기 법정기한 3개월을 넘긴 항소심 재판 비율이 무려 84.5%에 달한다는 건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더 이상 "판사들이 권력의 눈치를 본다"거나 "사법부가 정치권에 휘둘린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재판의 신속화·정상화를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 요즘처럼 정치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사법부마저 믿을 수 없다면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다. 사법부가 무너지면 민주주의도 정치도 무너진다. 달라진 조희대 사법부의 재판 모습을 기대해 본다. 영국의 사상가이자 법철학자인 존 로크는 "법이 끝나는 곳에서 폭정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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