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악연’ 카터의 100세 생일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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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군사관학교 홈페이지에는 자랑스러운 동문들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1순위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다.
1972년 터진 워터게이트 사건은 카터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1981년 1월20일까지 이어진 카터의 대통령 임기는 한국 현대사의 암흑기와 정확히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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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군사관학교 홈페이지에는 자랑스러운 동문들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1순위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해사에 입학한 카터는 전쟁 기간 생도 신분이어서 실전 경험을 쌓진 못했다. 소위 임관 후에는 잠수함 장교로 일했다. 당시 막 개발된 핵추진 잠수함에서 근무할 요원으로 뽑힐 만큼 능력을 인정 받았지만 1953년 대위로 현역 복무를 마쳤다. 그해 타계한 부친의 가업인 조지아주(州) 땅콩 농장 운영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카터가 해사 졸업생 중 유일한 대통령인 만큼 카터에 대한 미 해군의 애정은 대단하다.
1981년 1월20일까지 이어진 카터의 대통령 임기는 한국 현대사의 암흑기와 정확히 겹친다. 박정희 대통령과 사이가 나빴던 그는 1970년대 말 주한미군 완전 철수 카드를 꺼내 한국 정부를 당황케 했다. 비록 철수는 없던 일이 되었으나 동맹국 미국을 향한 불신이 커지는 부작용을 낳았다. 카터 행정부는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그에 따른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 이듬해인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오늘날 그가 한국인들의 비판을 받는 이유다.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한참 지난 1994년 여름 카터는 다시 한반도 이슈의 중심에 섰다.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북한과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 간에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위기가 고조되자 중재자를 자처하고 평양을 방문해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하지만 그 직후 북한 주석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회담은 없던 일이 되었고 카터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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