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서울 지하철은 왜 평양보다 1년 늦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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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첫 지하철 개통은 1974년 8월 15일의 일이었습니다. 어떤 중요한 날을 기존의 중요한 날에 맞춰 행사를 하게 되면 뒤로 갈수록 기억에서 밀리기 쉽습니다. 지하철 개통은 1945년 8·15 해방과 1948년 8·15 정부 수립에 밀렸고, 끝내 행사 당일에도 박정희 대통령 암살 미수와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에 밀렸습니다. 아마 올해가 한국 지하철 50주년이라는 사실도 8·15 광복절에 밀려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기는 부분이 있습니다.
서울의 지하철은 왜, 도대체 왜 평양 지하철 개통보다 늦었던 것인가?
제가 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제5공화국 시절, 그러니까 2~4호선이 차례로 개통해 지하철이 비로소 지하철다워지고 있던 1980년대의 일이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수업 중 지하철에 대해서 설명하던 중, 갑자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북한에도 지하철이 있다고 그러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선생님의 다음 말이었습니다. 그는 조금 낮은 톤으로 이런 말을 빠르게 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우리보다 잘 돼 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평양 지하철이 처음 개통된 것은 1973년 9월 6일이었습니다. 남북한이 한창 체제 경쟁을 하고 있을 무렵, 왜 지하철 개통에서는 뒤졌던 것인지 의아했습니다.
우선 서울 지하철이 건설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활용할 만한 자료는 1970년대 서울시에서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 내무국장 등을 역임한 손정목(1928~2016)이 2005년에 낸 두 권 분량의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입니다. 막후의 비화를 솔직하고 풍부하게 실었기 때문에 공식 기록보다도 사료적 가치가 높은 부분이 많다고 평가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서울에 지하철을 건설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구 폭증’에 있었다고 합니다.
1955년 157만 명 정도였던 서울 인구는 1970년에는 552만 명을 넘어설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촌향도 현상에 따른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였습니다. 교통량 역시 크게 늘어났으니 대책 마련이 시급했습니다. 그래서 지하철 건설 구상이 처음으로 나온 것이 1964년이었다고 합니다. 지하철이 건설된 세계 도시를 보면 대략 도시 인구 200만~300만 명 때였으니 서울도 지하철을 도입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하철 초창기에는 지하철을 ‘전차’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1899년 첫 운행을 시작해 1968년까지 서울의 곳곳을 운행했던 교통수단이 바로 전차였습니다. 이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지금 세대에선 트램(tram)이라고 부르고, 서울 위례지구, 울산, 화성 같은 여러 지자체에서 새롭게 건설하거나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당시 서울 전차의 속도는 시속 7㎞ 정도였다고 합니다. 너무 느려 오히려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철거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6년 동안 서울 서민의 대중교통은 사실상 버스가 유일했습니다.
‘불도저 시장’이라 불릴 정도로 수 많은 길을 뚫고 서울의 모습을 바꿔 놨던 김현옥 시장은 지하철 건설만큼은 추진하지 못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였다고 합니다. 기술과 자금 문제였죠. 1970년 4월, 김현옥 서울시장이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후임으로 임명된 사람은 양택식 시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지하철 건설을 결심하고 다음 달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계획을 보고했습니다.
이것을 전해 들은 김학렬 경제부총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촌놈이 알지도 못하고 건방지게!”
왜 자신에게 먼저 보고하지 않았느냐는 질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각하, 지하철을 건설하면 나라가 망합니다!”
인프라 구축으로 인해 서울에 인구가 더 몰리게 되고, 투자의 우선순위상 다른 곳이 먼저란 얘기였습니다. 그는 다른 자리에서 그 동안 성취한 경제개발계획의 실적을 설명한 뒤 “그러나 국민이 까불면 도로아미타불이 된다”고 했을 만큼 독설가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박 대통령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때 정부의 실세였던 이후락 주일대사가 잠시 귀국해 청와대를 찾았습니다. 상황을 설명한 대통령이 “어떡하면 좋겠소?”라고 물어 보니 이후락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하철 건설은 세계 대도시의 공통된 추세로 알고 있습니다. 구미 각국의 대도시치고 지하철이 없는 도시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일본의 도쿄·오사카에서 지하철이 멈춰서게 되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의 기능이 정지될 것이고 수천만 시민의 생활에 일대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서울에도 지하철 건설이 시급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대단히 합리적인 설명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대통령은 마음을 굳혔습니다.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빌리고 기술을 도입해 1971년 4월 12일 서울 지하철 1호선의 기공식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후 서울 지하철이 건설되는 과정을 아무리 봐도 ‘북한 지하철’을 의식했다는 대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손정목은 ‘한국 도시 100년의 이야기’ 2권 27쪽에서 단지 이렇게 쓸 뿐입니다. “1972년 당시 한국의 일인당 GNP는 겨우 300달러에 불과하였다. 300달러 소득 국가에서 지하철을 건설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우선 재외 공관장들이 1973년 1월 28일과 2월 13일, 두 차례에 나누어 공사장을 시찰한다(당시 북한에도 지하철이 있었으나 그것은 불과 몇 킬로미터밖에는 안 되는 전시용 시설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20㎞는 넘는다고 하는 평양 지하철을 좀 폄훼한 느낌은 들지만, 지하철 1호선과 수도권 전철 건설 당시 아무도 북한의 지하철 건설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 서울 지하철이 평양보다 1년 늦은 것은 ‘북한을 굳이 신경쓰지 않았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럼 북한은 왜,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지하철을 지었던 것일까요. 사실 예전에는 북한에 대한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소문이 부풀려진 면도 많았습니다. 일본 좌파 운동권이 한때 북한을 ‘이상적인 자급자족 경제 체제’로 오해했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소련의 도움으로 1968년 착공한 평양 지하철은 1973년 9월 6일 천리마선 봉화역에서 붉은별역까지 개통됐고, 1975년 10월 혁신선 혁신역에서 락원역까지 개통됐다고 합니다. 1978년 9월 혁신역 광복역까지 추가 개통됐고, 1987년 4월 10일 천리마선의 연장선인 만경대선이 부흥역까지 개통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로 무려 37년 동안, 신규 개통 구간은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북한이 주체사상 수립에 본격적으로 나선 1970년대는 인민문화궁전, 조선혁명박물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만수대예술극장 같은 ‘기념비적인 대형건물’이 많이 건설된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평양 지하철도 바로 이 ‘기념비적 대형 건물’에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북한을 ‘내재적 접근법’을 통해 우호적으로 보는 듯한 어떤 미술 전문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평양 지하철의 내부 역시 동구권 사회주의 건축양식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각양각색 샹들리에와 다양한 색돌을 붙인 모자이크 벽화들은 인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한 사회주의의 이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형 건물을 통해 체제를 미화하고자 한 북한 김일성의 정책은 남한의 박정희와는 크게 달랐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입니다. “박정희의 서울은, 지나치게 큰 기념물을 세우는 데 급급해 결국 ‘거대한 연극 세트장’을 만들고 만 김일성의 평양과는 달랐다. 박정희의 서울은 개인 숭배와 도시계획을 결합하지 않았고, 화려하고 과시적인 모습을 오히려 자제했다. 그 결과, 서울은 활력과 자유가 넘치는 ‘시민의 도시’가 됐다.”
평양에서 지하철을 타려면 매우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건물 50층에 해당하는 지하 150m는 가야 플랫폼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모두 유사시 방공호로 쓰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한때 ‘외국인이 방문할 때만 운행하는 유령 지하철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습니다만, 다니긴 다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접할 수 있는 북한 정보도 많아졌는데, 많은 외국인(주로 일본인)이 평양 지하철을 타 보고 촬영한 동영상이 유튜브에도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이 영상들을 보고 나니 북한 지하철의 특징이 몇 가지 눈에 띄었습니다.
―대단히 깊숙하게 지하로 들어간다.
―역사가 대단히 크고 웅장하며, 샹들리에와 체제 선전용 벽화도 곳곳에 보인다.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하고 번쩍거리지만 휴지통 같은 것은 찾기 어렵다.
―매점이나 자판기 같은 편의시설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플랫폼에서 의자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승객이 서서 열차를 기다린다.
―스크린도어 같은 건 없다.
―열차를 타는 위치를 표시하지 않아, 열차가 도착할 무렵 사람들이 열차 문 쪽으로 황급히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역무원이 깃발이나 표지판(?)을 들어 열차를 멈춘다.
―문이 자동으로 열리지 않아 사람들이 손으로 잡고 미닫이문처럼 문을 연다. 이러다 보니 타는 사람이 내리는 사람보다 먼저 타는 경우도 보인다.
―반면 닫힐 때는 대단히 빠르고 거세게 ‘쾅’ 하고 닫혀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터넷에선 ‘문이 단두대 같다’는 말도 나온다. 분명히 다치는 사람이 나올 것인데 그냥 두고 있다.
―대체로 차량 안이 어둡다.
―각 차량 안에는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가 붙어 있다.
―차량마다 역무원이 한 명씩 타는 것으로 보인다.
일견 장엄해 보일 수도 있고 ‘1980년대 서울 지하철보다는 잘 돼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것이 과연 ‘사회주의 이상향의 교통수단’일까요.
가장 결정적인 남북한 지하철의 차이는 운행하는 노선의 길이와 복잡성의 차이일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남북한 체제의 격차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평양 지하철의 총길이는 (노면 전차 포함해서) 22.5㎞
수도권 전철의 총길이는 1302.2㎞
웅장하고 화려하고 깊숙한 평양 지하철은 ‘서울보다 1년 앞서 개통됐다’고는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관광객들에겐 좋은 구경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일 1호선 시청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만약 100~150m 깊이를 번번이 내려가 지하철을 타야 한다면, 참 끔찍한 일일 겁니다. GTX 수준의 속도로 갈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버스를 타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서울과 평양 지하철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양 지하철은 정치적·군사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반면, 서울 지하철은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말입니다. 철도에 관심이 많은 저는 언젠가 평양에 가서 지하철을 꼭 한 번 타보고 싶지만, 결코 두 번 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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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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