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규의 외교만사 外交萬思]현실주의적 민족주의의 부활과 그 비극
현 국제정치 정세는 그 종착역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당분간 그 미래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미국의 자유주의적 패권질서를 대신하여 들어설 새로운 질서에 대한 밑그림이 아직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유주의적 패권질서의 가장 큰 수혜자이자 가장 훌륭한 학생이었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불안하고 아쉽고 고통스럽다. 한국은 국토분단과 대립의 비용에도 불구하고, 그간 높은 수준의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달성하였고, 세계 10위권의 국력을 지닌 국가로 성장하였다.
자유주의 질서는 민족국가의 영역을 넘어서는 시장의 확대와 협력, 규범과 제도에 대한 존중,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의 중시와 진보론적 역사 발전관을 담고 있었다. 이 진영에 속한다는 것 자체로도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자유주의적 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했을 때,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은 현실주의가 상정하는 만인과 만인의 투쟁이라는 ‘자연상태’ 혹은 혼돈이다. 국제정치라는 공간에서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해양 세력의 중간 지대에 놓인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이러한 국제정치 질서의 대변동에 직면했을 때, 항상 파쇄적인 상황으로 전락하였다. 거란전쟁, 몽골의 팽창, 명·청 교체기와 고려의 멸망, 임진왜란, 병자호란, 제국주의의 쇄도와 조선 제국의 합병, 한국전쟁 등 비극의 역사가 이어졌다. 현재 우리는 미·중 전략·패권경쟁에 직면해 있다.
국제적 제도보다 자국 이익 우선
이 시대를 아우르는 가장 주요한 추세가 정치 현실주의와 민족주의의 기묘한 결합이다. 정치 현실주의에 따르면 모든 국가는 각자 생존의 기로에서 최대한 자국 이익을 보호하고자 한다. 보호주의와 비도덕적 정책과 책략들이 횡행한다. 가치와 같은 소프트파워보다는 군사, 경제, 과학기술 같은 하드파워가 절대적으로 우선시된다. 원칙보단 상황 변화에 대처하는 유연성과 명민함이 중시된다. 그리고 국가 생존의 최고 수단으로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경주된다.
본래 근대 민족국가 체제에서 ‘민족’이란 종족이나 혈연공동체와는 다른 개념이다. ‘신’의 영역이 사라진 국제정치 공간에서 생존투쟁 도구로서 ‘민족’은 형성되고 재구성되었다. 주권적 국가와 영토를 수호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현존하는 국가 영토 내에 존재하는 과거 역사는 새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각 민족국가는 역사를 국가 강화를 위한 도구로 일정 부분 왜곡한다. 이 ‘민족’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국가 역량의 결집이란 측면에선 긍정적 기제가 된다. 그러나 이 ‘민족’이 대외 공세적 기제로 활용될 때는 악마적 속성을 강하게 드러내게 된다.
혼돈의 시기에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역사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가 역량 강화를 위해 민족 결집을 위한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는 정쟁이다. 대한민국은 국제 정세를 보는 시각에 따라 두 개 진영으로 나눠지고 있다. 하나는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신뢰와 미련을 가진 집단이다. 이들은 바이든 정부가 제시한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싸움이라는 신냉전적 정세관을 수용한다. 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하나는 미국은 약화되고 다극화 추세가 강화되면서 중국과 러시아가 급부상한 현실을 수용한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 시기처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통해 민족이 하나가 돼 이러한 외세의 도전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도 국론이 분열되기는 마찬가지이다. 포용적인(Melting Pot) 미국 민족주의는 급속히 해체되고 있다. 기존 자유·민주 정치제도에 대한 불신과 기존 올바름에 대한 거부가 트럼프 현상을 낳았다. 미국 우선 사고와 보호주의가 만연하고, 자국의 이익이 어떤 국제적 제도보다 우선이다. 미국 대외정책의 흐름 중 가장 고립주의적이고 폐쇄적으로 민족주의를 이해하는 잭슨주의가 새로운 조류가 되고 있다. 미국은 축소지향형이다.
한국, 충돌보다 협력 중시해야
중국은 ‘중화민족주의’라는 새 개념을 들고나왔다. 기존의 중국 한족과 이민족들을 구분하였던 화이(華夷)관을 넘어 화이가 이제는 하나의 중화민족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중화민족 부흥은 공산당 강화, 핵심이익 수호, 국가안보·정보통제 강화, 애국주의 열풍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팽창적 민족관을 내건 중국의 민족주의는 자신들이 자유주의적 슬로건을 담아 내세운 ‘인류운명공동체론’과의 모순이 불가피하다. 중국의 새로운 민족 해석은 주변국들에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다.
러시아는 전통적인 자신들의 민족과 영토 수호를 내걸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시작하였다. 북한은 백두 혹은 김일성 민족이란 개념에 기반하여 이제는 한반도 두 국가 체제를 주장한다. 일본은 논리적 모순이나 과거 유산을 무시하고서라도 새로운 민족 결집을 추진하고 있다. 새로운 일본 민족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국제적 역할과 위상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정치 현실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의 부활은 국가 사이에 타협이나 협력의 여지보다는 분리, 경쟁, 충돌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현실주의적 민족주의의 공간에 자유주의가 설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한국은 강력한 자국 이기주의로 무장한 트럼프(혹은 해리스)의 압력, 일본과 남해 제7광구의 개발권을 둘러싼 강한 갈등과 충돌, 중국과 중화민족의 역사 해석을 놓고 대대적인 마찰, 러시아의 비우호적인 한반도 개입, 백두 민족을 주장하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다. 현실주의적 민족주의 시기 한국이 설 자리는 지극히 좁아 보인다.
현실주의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긴 어렵지만, 이를 넘어서야 기회의 땅이 열릴 테다. 미국과의 동맹에 대한 맹목적 집착, 중국의 부상과 위협에 대한 편승, 북한에 대한 이상주의적 기대와 접근을 넘어 새로운 제3의 대안이 필요하다. 이는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면서도 보다 개방주의적·포용적인 국제질서의 수립, 우리 역량에 기반한 군사안보 실현, 충돌보다는 협력을 중시하는 주변 강대국 관계, 대항성을 인정하면서도 평화와 공존을 우선시하는 대북정책 등을 내용에 담아내야 한다.
김흥규 (사)플라자프로젝트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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