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 무관 vs 근본 원인… 여전한 시각차
투자자 "지배구조 개선 필수요건"
전 세계 주요 증시와 우리나라 증시간 상승률 격차가 벌어지면서 국내 자본시장 저평가 해소가 주요 이슈로 급부상했다. 금융당국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방안 중 하나로 내놓은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야당과 개인, 해외 기관 투자자들까지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밸류업'의 핵심 과제로 꼽았지만, 기업은 상법 개정이 기업 경영을 위축시키고, 소송 리스크만 확대할 우려가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지배구조 개선 필요성을 강조하던 당국과 정부 여당도 한 발 물러서며 상법 개정 역시 난항이 예상된다.
3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국회에 발의된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은 총 8개로 집계됐다. 모두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등 야당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이다.
구체적인 개정 내용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발의된 개정안 모두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현재 '회사'로 한정돼 있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단순히 법 조항에 문구 하나를 포함하는 것이지만, 이를 통해 이사가 소액 주주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막을 수 있다고 봤다.
회사의 핵심 부서를 떼어내 새로운 법인으로 상장하는 '쪼개기 상장'의 경우 회사나 대주주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기존 법인의 주식을 들고 있는 소액주주 입장에서는 주식 가치가 하락해 피해를 보게 된다.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가 회사뿐 아니라 일반 주주의 이익까지 고려하게 된다면 이같은 쪼개기 상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소액주주의 권익 향상은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취지에도 부합한다.
개인 투자자들은 상법 개정을 대부분 환영하는 모양새다.쪼개기 상장 외에도 최근 문제가 된 '두산 밥캣' 합병과 같은 지배주주만을 위한 회사의 결정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개인 투자자들의 주장이다.
해외 투자자들도 한국 증시 밸류업을 위해서는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이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박유경 네덜란드연금자산운용 전무는 최근 토론회에서 "이사회가 모든 주주를 위해 일하지 않고 지배주주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고 일반 주주를 보호해 주는 장치는 없다"며 "최소한 상법에서라도 주주를 위한 책임이 있다고 이사회에 말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기업 측은 지배구조 개선과 밸류업이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대한상의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아시아 12개 국가의 지배구조와 증시를 분석한 결과 지배구조 순위와 주가지수 상승률 순위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의 지배구조 평가에서 8위를 차지했지만, 지난 2020년 1월부터 2024년 9월까지 주가지수 상승률 순위는 5위를 기록했다. 지배구조 점수가 가장 높은 호주의 ASX200지수 상승률은 16%로 우리나라보다 상승률 순위가 낮았다는 것이 대한상의가 주장하는 주된 요지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밸류업의 핵심은 주가 부양인데, 주가는 국제적인 상황과 국내 여건 등이 엮여져 있어 기업 지배구조가 주가 부양의 핵심 키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기업의 지배구조를 뜯어고치는 것을 밸류업 방향으로 잡았다"고 말했다. 이어 "법으로 지배구조를 뜯어고치는 것은 해외에서 선례를 찾기 어려워 부작용이 생겨날 여지도 크다"며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가 기업 밸류업에 영향을 미친다면 주가가 높거나 배당을 많이 주면 무조건 지배구조가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인데 이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ACGC의 아마르 길 사무총장도 최근 "한국의 지배구조 순위가 한 단계 올라간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도 "밸류업 프로그램 출범은 올바른 방향이지만 주주권리 강화를 위한 입법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고 의무 공개매수제도 같은 입법제안도 국회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대한상의가 자료로 제시한 아시아 지배구조 상위 8개 국가 중 작년 말 대비 현재 주가가 오르지 않은 곳은 한국이 유일했다. 올해는 코로나 엔데믹 이후 금리인하 기대감이 높아지며 글로벌 증시가 모두 상승세를 타던 시기였지만, 우리나라만 제자리에 머무른 셈이다.
이밖에 주요 외신들까지 밸류업 프로그램이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재벌 위주의 지배구조 개선이 우선이라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기업 측의 주장이 힘을 잃고 있는 모양새다.
정의정 주식투자자연합회 대표는 "이사의 충실의무가 확대되면 소송 리스크 확대 등으로 기업이 신규 투자나 합병을 꺼려 오히려 밸류업을 저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까지 기업이 소액주주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해왔다고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라며 "결국 지금 가지고 있는 본인들 밥그릇을 뺏기기 싫다는 것 아니겠냐"고 되물었다.
김남석기자 kn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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