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부산시민의 날’에 ‘부산대첩’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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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는 1980년 '부산시민의 날'을 10월 5일로 제정했다.
손재식 시장 재임 시 부산시민의 날을 제정하고자 각계 여론을 수렴한 결과 동래부사 송상현공 순절일(5월 25일), 부산대첩 승전일(10월 5일), 부산항 근대 개항일(2월 27일), 부산부에서 부산시로의 승격일(8월 15일), 부산시민헌장 제정일(8월 1일), 부산직할시 승격일(1월 1일) 등 6개 안이 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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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는 1980년 ‘부산시민의 날’을 10월 5일로 제정했다.
손재식 시장 재임 시 부산시민의 날을 제정하고자 각계 여론을 수렴한 결과 동래부사 송상현공 순절일(5월 25일), 부산대첩 승전일(10월 5일), 부산항 근대 개항일(2월 27일), 부산부에서 부산시로의 승격일(8월 15일), 부산시민헌장 제정일(8월 1일), 부산직할시 승격일(1월 1일) 등 6개 안이 제시됐다. 이들 중 시민의 제의가 가장 많았던 부산대첩 승전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결정해 1980년 9월 10일 확정·공포해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부산시민의 날이 왜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날이라 이를 자랑하고 이날을 기념하면서 부산대첩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겨야 하지만 아직 대다수의 시민은 제정 취지나 유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임진왜란에서 왜의 육군은 부산에 상륙 후 20일 만에 서울까지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해 선조는 의주로 피신했다. 그러나 남해 바다는 이순신의 활약으로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적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왜의 수륙병진 전략을 무위로 만들어 종국에는 임진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했다.
그렇다면 부산대첩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왜가 강화협상을 요구하게 된 계기가 됐고 나라를 살려내는 원동력이 됐던 역사적 전투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산대첩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없고 우리 부산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창 공사 중인 부산항 북항 일대에서 일어난 부산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1592년 10월 3일 밤 부산 가덕도 천성포구에 도착해 하룻밤을 지내고 4일 낙동강 하구에서 적선 6척을 불태운 뒤 가덕북쪽 동매산 아래서 1박 하며 전략을 토의했다. 10월 5일 새벽에 부산포로 진격하던 중 화준구미(지금의 사하구 다대포 부근)에서 적선 5척, 다대포에서 8척, 서평포(지금의 사하구 구평동)에서 9척, 영도에서 2척을 격파한 뒤 부산포에 이르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했다. 그날 밤 다시 가덕으로 돌아가 1박한 뒤 부산을 떠나 전라좌수영으로 돌아간다. 부산대첩은 이러한 전투의 중심이 되는 부산포 승첩에다 부산포로 진격하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적선 130여 척을 깬 전투를 통틀어 말한다.
부산대첩의 격전지가 자성대성 앞쪽에서 북항 쪽에 이르는 곳이고 보면 부산 북항은 왜적의 해로 침략을 봉쇄한 국토수호의 성지이며 부산의 자랑스러운 민족문화 유산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때마침 지난 1월 31일 부산항 북항 지역의 주 간선도로를 ‘이순신 대로’로 명명해 개통됐다. 이제 부산도 나라를 살려내고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구국의 초석이 된 부산대첩을 위대한 호국의 역사적 산물로 삼아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부산대첩이 일어난 부산항 북항 일대에 부산대첩기념공원과 기념관을 조성한다면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UN평화기념공원과 더불어 역사적 연결 고리로 하는 새로운 랜드마크가 탄생할 것이다. 그러면 부산이 임시수도 이후 100년의 역사가 아닌 500년의 위대한 호국 역사와 문화관광이 어우러진 품격 있는 도시로 거듭나 글로벌허브 도시로서 면모를 갖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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