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재원의 정치평설] 김정은보다 못한 미국 대선 대비
지난달 26일 미국 워싱턴DC에서 미국기업연구소(AEI)가 개최한 대담에 내외의 시선이 집중됐다. 트럼프 행정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로버트 오브라이언의 참석 때문이었다. 그는 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국무부 장관 제1순위로 꼽혀온 인물. ‘트럼프 2기’ 대외안보 정책의 길라잡이인 셈이다. 이날 주제 역시 ‘미국 안보에 대한 중국의 포괄적 위협’. 실제 그는 구체적 대응 방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정작 불똥이 한국으로 튀었다. 한·미·일 공동협력을 강조하며 일본 방위비 증가 노력을 소개한 뒤 한국 국방비 증액을 불쑥 제기한 것. “한국도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2.5% 수준에서 미국처럼 3~3.5%로 올려야 한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GDP는 약 2조 달러(약 2600조 원). 2.5%라면 65조 원. 실제 올해 국방예산은 59조 4000억 원이다. 그의 말처럼 GDP 1%, 26조 원을 더 올리면 91조 원이다. 한꺼번에 예산을 44% 증액해야 한다. 올해 경기침체로 세수가 이미 29조6000억 원이나 ‘펑크’난 상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다. 그렇다고 트럼프가 봐줄 것 같진 않다. 전체 국방비는 몰라도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의 증액만큼은 관철하려 들 것이다. 과거 재임 시절 연 1조389억 원(2019년)이던 분담금을 한꺼번에 5배가량 올려 5조8000억 원을 요구한 바 있다. 아마도 물가 인상과 재집권 자신감을 바탕으로 “묻고 더블로 가”라고까지 할 수도 있다.
오브라이언은 이날 북한도 콕 집어 언급했다. “북한과 이란은 미국보다 훨씬 더 많은 원심분리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최근 북한의 노골적 핵 위협을 다분히 고려한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북한 관영매체는 지난달 13일 핵폭탄용 고농축우라늄(HEU) 추출 원심분리 시설을 전격 공개했다. 그동안 극비였던 시설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시찰하는 사진을 통해서였다. 트럼프 재집권을 겨냥한 대미 협상용이라는 게 지배적 해석. 김정은으로선 일단 미국 시선을 끄는 데 성공한 셈이다. “재집권하면 나는 그와 잘 지낼 것이다.” 이미 트럼프가 이렇게 공언한 이상, 두 사람의 핵 담판은 다시 현실화할 수 있다. 문제는 비핵화가 아니라 기존 핵무기를 인정한 상태에서의 ‘현상유지(status quo)’쪽으로 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 우린 영원히 북한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오브라이언의 발언을 자세히 소개한 이유는 단 하나. 미국 대통령 선거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다. 사실 대한민국 현대사는 역대 미국 대통령과 촘촘히 얽혀 있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 독립을 제일 먼저 천명한 1943년 카이로선언. 당시 중국 장제스 총통보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의지가 더 크게 작용했다는 게 요즘 연구 결과다. 그의 뒤를 이은 트루먼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물론 유엔군 파병을 주도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제일 먼저 한국으로 날아와 휴전협정을 재촉했다. 이승만의 반발 무마를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제안했다.
케네디는 5.16 군사정권을 사실상 인정했다. 존슨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이끌어 냈다. 당사자 스스로 아시아 방위를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 남한 주둔 미7사단 철수와 베트남의 공산화 통일로 이어지면서 박정희를 ‘멘붕’에 빠뜨렸다. ‘인권 외교’를 외치며 주한미군 철수를 공언한 카터는 번번이 유신정권과 충돌했다. 10.26 사태가 일어나자 미국 배후 음모론이 불거졌다. 레이건의 등장은 광주학살로 집권한 전두환에겐 ‘복음’이었다.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한 레이건의 반공과 보수주의에 편승해 미국 맹방을 자처했다. 냉전을 해체한 부시(아버지)는 주한미군 핵무기를 철수시켜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족쇄를 풀어줬다.
클린턴은 북한의 핵 개발에 대북 폭격까지 검토했다. 그러나 자신이 보낸 대북 특사 카터와 김일성의 담판으로 돌파구가 열려 북한과 ‘제네바 합의’에 이어 수교 직전까지 갔다. 아들 부시는 “악의 축”으로 명명한 북한의 HEU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반발한 북한은 급기야 2006년 제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오바마는 북핵 위협을 빌미로 한일 관계 개선을 강하게 압박했고, 박근혜 정부는 한일 위안부합의에 서명했다. 트럼프는 모두 3차례나 김정은과 직접 핵 담판에 나섰다. 상당한 기대를 자아냈으나 막판 고비를 넘지 못했다. 바이든은 고도화되는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맞서 ‘워싱턴 선언’을 한국과 합의했다. 이에 따라 미 핵 자산에 한반도 상시 임무가 떨어졌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카터가 레이건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면 전두환 정권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아들 부시가 아닌 클린턴의 대북 협력 기조를 이은 민주당 고어가 당선됐다면 북미관계 정상화로 북핵 개발은 멈췄을까. 부질없는 상상이라고만 치부할 순 없다. 그만큼 미국 대선 결과는 우리 생존과 직결돼 있다는 얘기다. 이제 한 달 남은 미국 대선. 그저 ‘한미동맹’을 되뇌며 넋 놓고 구경만 해선 절대 안 된다. 해리스든, 트럼프든 모든 경우의 수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부도, 국회도 너무 조용하다. 정쟁 공방만 요란하다. 김정은이 배시시 웃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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