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칼럼] 박정희의 마지막 국군의 날, 그날의 일기장엔
주한 미군 완전 철수 일방 통보
朴 정권 71년부터 전시체제
79년 “역사상 첫 막강 국군”
재래식 역전하자 北核 새 위협
朴이라면 어떻게 돌파했을까
조선일보 1970년 6월 6일 자 1면 톱 제목은 하루 전 발생한 “해군 방송선 피랍”이었다. 이름이 방송선이지 어선단 보호 임무를 맡은 현역 해군 함정이었다. 그런데도 단 15분 교전만에 우리 승무원 20명 대부분이 사상된 상태에서 납치당했다. 120톤급 우리 함정은 최대 속력 12노트, 40mm 기관포인 반면, 250톤급 북한 함정은 최대 속력 25노트, 75mm 기관포였다. 애초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여론은 들끓었다. “고기잡이 배도 아니고 어떻게 해군 함정이 끌려가느냐.” 해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육군의 주력 탱크 M-4는 76mm포, 북한군의 T-54, T-55는 100mm포였다. 미국이 2급 동맹국에 주는 F-5는 북한의 최신예 미그 21의 적수가 아니었다. 6·25 이후 북한은 소련 현역군 수준으로 장비를 제공받은 반면,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에 질린 미국은 2차대전 때 쓰던 퇴역 장비로 한국군을 무장시켰다.
두 달여 뒤 애그뉴 미 부통령이 주한 미군 감군 협의차 방한했다. 김정렴 비서실장 회고록은 박정희 대통령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2주일 동안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회담 준비에 온 힘을 쏟았다. 사색하고 메모하고, 다시 사색하고 메모를 수정했다.” 8월 25일 오전 10시에 시작된 회담은 예정된 2시간을 훌쩍 넘겨 오후 4시에 끝났다. 점심은 커피와 케이크로 대신했고 아무도 화장실에 가지 못했다. 다음 날도 청와대 조찬 형식으로 1시간 30분 동안 추가 회담이 열렸다. 그래서 “7사단 2만명 이상의 감군은 없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애그뉴는 한국을 출발한 기내에서 “5년 내 완전 철수가 기본 방침”이라고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충격 속에 침묵했다.
적은 버거웠고, 동맹은 못 미더웠다. 박 정권은 ‘자주국방’을 위한 전시체제로 재편됐다. 방위산업을 총괄하는 오원철 제2 경제수석이 1971년 임명되고, 국방과학연구소(ADD)는 총포, 탄약, 로켓 등 군사 장비별로 개발을 맡는 기구 개편을 했다. 오 전 수석 회고록 5권과 7권에는 ADD 연구원들이 기름 범벅 옷도 못 갈아 입고 밤샘 작업으로 병기를 개발해 나간 기록들이 담겨 있다. 과로와 사고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기도 했다. 1973년부터 국군의 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데는 이런 시대 상황이 작용했다.
1977년 6월 23일 창군 이래 최대 규모의 화력 시범 대회가 열렸다. 2000여 명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보병·전차·포병·공병 합동 공격이 선보였다. 71년 11월 80mm 박격포부터 77년 5월 한국형 장갑차까지 시기별로 개발된 20여 개 국산 무기가 전시됐다. “이제 미군이 떠나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는 박 대통령 발언이 신문에 담겼다.
1978년 9월 26일 세계에서 7번째로 유도탄(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한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북한보다 10년 늦게 방위산업에 착수한 한국이 북한을 앞질렀다”고 보도했다. 소련 국방부 기관지 ‘붉은 별’은 “한국의 유도탄 생산은 핵무기 생산의 예고”라는 제목으로 관련 보도를 했다. 70년대 말 극장 영화 상영 직전 대한뉴스에서 군사 장비 화력 시범이 나올 때마다, 고등학생이었던 필자는 “맨날 똑같은 타령”이라고 투덜댔다. 당시 실제 상황을 알고 나니 선배 세대들의 분투에 새삼 숙연해진다.
박 대통령은 1979년 10월 1일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국군의 날, 여의도 행사장에 동원된 장비 중 80% 이상이 국산이었다. 우리 역사상 이렇게 막강한 국군을 가져본 것은 처음이리라. 공산 침략 도배들과 혈투를 거듭하며 막강한 대군으로 성장했다.” 국가적 소명을 이뤄냈다는 뿌듯한 감회가 느껴진다. 비극적 최후를 맞기 25일 전이다.
10·26 대통령 시해에 이어 12·12 군사반란을 거치며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제2 경제수석실은 폐지됐다. ADD엔 숙청 바람이 불면서 미사일 개발 요원들이 대거 잘려 나갔다.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형 미사일은 엉터리다. 담당 팀을 해체시키라”고 지시했다(오원철 회고록)고 한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정통성 확보를 위해 미국 지지에 몸이 달았던 신군부와 한국의 핵·미사일 개발에 신경이 곤두섰던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 짐작할 뿐이다.
70년대 초 3대1로 열세(영국 전략연구소)였던 남북 간 재래식 군사력은 완전히 역전됐지만, 대한민국 안보는 이제 북의 핵·미사일 도박이라는 새로운 위협을 맞고 있다. 박정희라면 이 사태를 어떻게 돌파하려 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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